“자, 암전∼ 갑니다∼ 조명 인!”
“후우.”
“오빠, 이거 정말 이렇게 간다는 거야?”
“인성아 너무 부정적으로 보지 마.”
13일 오후 10시 40분 서울 성북구 성신여대 근처의 한 건물 지하.
15평 남짓한 공간에는 7, 8명의 사람들이 모여 연극 연습 중이다. 전면 거울이 달린 문가에는 15명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다. 이들은 극단 ‘무리’의 단원. 28일 막을 올리는 ‘술집’(위성신 작)의 연습실이다. 무대 한편에는 ‘D―15’라고 쓴 종이가 붙어 있고 다른 한편에는 3월 27일부터 ‘X’ 자로 채워진 공연 일정표가 걸려 있다.
○ 단원 70명… 공연은 그때그때 형편맞는 사람들이 참여
극단 ‘무리’는 직장인 극단이다. 단원은 모두 70명. 웹 디자이너, 물리치료사, 대기업 사원, 방송작가, 여행사 직원, 고등학교 교사 등 직업도 다양하다.
직장인 극단 연습실이지만 여느 극단의 연습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콘솔과 조명을 갖춘 것은 물론 무대 의상이 가득한 의상실도 있다.
‘무리’가 창단된 것은 1991년, 벌써 18년째를 맞았다. ‘술집’은 50번째 작품이다.
공연은 1년에 네 차례. 그때그때 형편에 맞는 사람들이 참여한다. 하지만 구성은 체계적이다. 공연을 앞두고 각 배우는 공연을 선택해 연출 기획서를 제출한다. 7명으로 구성된 운영진이 기획서를 꼼꼼히 검토한 뒤 공연을 선택하면 배우, 무대팀, 홍보팀이 꾸려지고 두 달간 연습에 돌입한다. 입단 절차도 만만치 않다. 4개월간 자체적으로 실시하는 아카데미를 거친 뒤 1년간의 평가과정이 지나야 비로소 정식 단원이 된다.
‘연극’을 바라보고 모인 사람들이지만 각자 배경이나 사연도 다양하다.
김영훈 씨는 학교 후배랑 술을 마시다가 술 잘 먹는 모임이 있다고 해 얼떨결에 가입한 경우. 임태호 씨는 개인사업을 하다가 사기를 당해 자살을 결심하고 인터넷을 뒤지던 중 극단 홈페이지를 발견해 가입했다. 정미숙 씨는 성우가 되고 싶은데 번번이 시험에 떨어져 연기를 공부하기 위해 참여하고 있다. 음향을 맡은 전유미 씨처럼 그저 사람을 만나고 싶어 들어온 경우도 있다.
○ 연습 때문에 수차례 이직…몸 부대끼다 보니 로맨스도 많아
연습 시작은 오후 8시. 근무를 마치고 시간 맞춰 오기란 여간 빠듯한 것이 아니다. EBS 교육사이트에서 웹 기획을 하고 있는 안지연 씨는 잔무가 많아 연습 시간에 자주 빠지게 되자 회사를 옮겼다. 연출을 맡은 김기수 씨는 연극 연습 시간 맞추기 위해 수차례 직장을 바꿨다. “회사를 옮길 때 가장 먼저 묻는 것이 연봉이 아니라 야근이 있느냐 없느냐예요, 하하.”
몸을 부대끼는 일이다 보니 종종 로맨스도 생긴다. 무대감독인 채상호 씨와 배우인 박상미 씨는 이곳에서 만나 결혼한 8년차 부부. 극단에서 맺어진 11번째 부부다. ‘무리’는 지난해 2세들만의 공연을 올리기도 했다.
오후 11시 30분. 연습이 끝났다. 연출 김기수 씨가 단원들을 모아놓고 혼쭐을 낸다.
“공연이 보름밖에 안 남았는데 대사를 먹고, 호흡이 아직도 불안해요. 이렇게 공연할 거예요? 못하는 사람은 선배들을 붙잡고 연습을 더 하든지, 내가 일일이 쫓아다니며 지적해 볼까요?”
목소리가 높아진다. 적막이 감돌았다. 그러나 이도 잠시. 둥그렇게 모여 “둘 셋, 술집, 술집, 파이팅!”을 외친다.
“힘들죠. 연습하며 ‘내가 미쳤지’ 생각도 해요. 그런데 공연이 끝나고 느끼는 희열감이 다 보상해 주죠. 그거 때문에 못 나가요.”(윤정용 씨)
“집에 있는 시간보다 여기 있는 시간이 더 많아요. 여길 떠나 이제 갈 데도 없어요.”(이지훈 씨)
“독하게 마음먹고 1년 안 해보기도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식구(단원)들이 눈에 밟혀서.”(박상미 씨)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