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달콤한 일탈? 꿈 깨시지!…‘유부남이 사는 법’

  • 입력 2008년 5월 17일 02시 58분


◇유부남이 사는 법/마르셀로 비르마헤르 지음·조일아 옮김/400쪽·1만 원·문학동네

《마흔 줄에 들어선 기자 A는 이제야 빛을 보는 기분이다.

만년 가십거리나 다룰 줄 알았는데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을 인터뷰하게 되다니.

아르헨티나에 온다는 소식을 듣곤 모든 인맥을 동원해 얻은 성과였다.

아내는 이런 득의만만함이 싫었나 보다.

넥타이를 매어주며 미 제국주의 어쩌니 하며 속을 긁는다.

근데 왜 이때 스페인에서 바람피웠던 그 여자가 생각나는 걸까.》

‘유부남이 사는 법’은 아르헨티나 소설이다. 2006년 ‘유부남 이야기’로 국내에서도 관심을 모았던 마르셀로 비르마헤르(42·사진)의 연작 소설집이다.

‘라틴아메리카의 우디 앨런’이라 불리는 그가 1999∼2004년 냈던 3부작 유부남 시리즈를 국내에서 선별해 두 권으로 묶었다.

단편집이지만 제목처럼 모든 주인공은 ‘유부남’이다. 아내와 토닥거리고 화장실에 틀어박혀 치약 튜브의 함유 성분이나 읽고 있는 40대 기자 A, 성인소설도 꽤 썼는데 동화작가로만 불리는 자신의 처지가 답답한 60대 소설가, 어린 시절 사촌 누이에게 했던 ‘이상한 짓’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30대 작가…. 일상에 찌들며 상상만 늘어가는 별 볼일 없는 가장들이다.

이들 가장이 꿈꾸는 상상이란 하나같이 ‘불륜’이다. 한 여자와 깊이 사랑에 빠져드는 것도 아니다. 여기저기 넘봤다가 괜히 혼자 아내한테 미안해하고. 가끔 성공(?)도 하지만 보통은 ‘작업’을 제대로 걸 용기도 없다. 소심하고 소심하다.

드디어 키신저를 만난 A를 보자. 가는 내내 여자 생각에 정신이 팔렸던 아저씨. 한두 질문은 괜찮다 싶었더니 머리가 텅 빈다. “그 스페인 여자가 나를 완전히 잊어버린 것처럼 그 질문들을 그렇게 허망하게 까먹고 말았다.” 일어서려는 키신저를 향해 던지는 마지막 질문. “미스터 키신저, 그렇다면 사랑을 하면서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잠시 침묵, 그리고 대답. “아이 돈 노(I don't know).”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나가버린다.

‘유부남이…’는 유쾌하다. 지지리 궁상의 불륜 얘기인데도 지저분하지 않다. 거창하거나 환상적이어서가 아니다. 바로 우리 옆에 앉아 있는, 아니 우리가 비치기 때문이다. 남이 하면 스캔들, 내가 하면 로맨스. 그 속에 늑대의 심보가, 인간의 마음이 담겼다.

작가는 2년 전 ‘2006 서울, 젊은 작가들’ 행사로 방한한 적이 있다. 당시 책의 번역을 맡은 이가 “소설 속의 주인공들과 당신은 공통점이 있나”라는 다분히 의도된 질문을 던졌다.

작가의 대답. “그들은 가상의 인물일 뿐이다.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물론 그렇겠지.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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