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은 난감했다. 봄날 늦은 오후. 종로 귀퉁이 선술집에 앉은 자신이 영 가당찮다. 아내는 반지 찾아 얼른 오랬는데. 근데 이 사람. 우연히 마주치곤 “형님, 형님” 하며 신세 한탄인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떨어져 앉은 그의 딸은 또 누구인가. 이름도 얼굴도 익숙지 않다. 그런데도 황은 왜 일어서질 못할까.(‘낯선 사내와 술 한잔’)
지난해 작가가 장편소설 ‘낯선 사람’들을 발표했을 때다. 소설가 박완서 씨는 발문에 “재미가 옥시글옥시글 밤을 새우게 하는 추리소설은 김영현, 네가 안 써도 쌔고 쌨는데, 하는 아쉬움은 읽어가면서 그래도 역시 김영현이구나, 하는 안도감으로 바뀌었다”고 썼다. 그가 ‘내 마음의 망명정부’(1998년) 이후 오랜만에 소설집을 냈다.
“작가의 길을 걸어오는 동안 한시도 철학도라는 사실을 잊어본 적이 없다”는 작가의 말이 아니어도 소설집은 전체적으로 무겁다. 쾌활하기엔 답답함이 많은 인생. 미래를 꿈꾸기엔 지금이 벅차고 과거가 옭아매는, 그런 이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표제작 ‘라일락 향기’를 보자. “T S 엘리엇의 ‘황무지’에 대한 일종의 패러디”라 부른 이 소설은 아내와 이혼하고 늙은 어머니 집에 얹혀사는 사내가 주인공이다. 사업은 망하고 아이는 커 가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아끼셨다는 라일락 화분. 마당에 심으려 땅을 파다 온갖 상념이 떠오른다.
크게 망각과 추억을 근간으로 했다는 소설집은 시종일관 ‘가라앉아 있다’. 읽는 속내에다 쿵쿵 돌덩이를 얹는다. 하지만 작가는 끄트머리에 남기는 게 있다. 떠돌이 고양이(라일락 향기), 마침내 안 사내의 이름(낯선 사내와…). 해결책은 아니어도 상처를 달래주는 무엇. 인생이 그렇지 않나. 이리저리 온종일 머리가 무겁다가도 시원한 냉커피 한잔이 마음을 어루만진다. 절망은 아직, 아직 멀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