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지 환산땐 611만6400장 분량
매일 16만~18만자 분량 정보 가득
《동아일보의 역사는 근대 여명기부터 일제강점기, 6·25전쟁, 4·19혁명, 5·16 군사정변, 5·18민주화운동, 1987년 6월 민주항쟁 등 한국 근현대사의 생생한 기록이다. 1920년 4월 1일 창간 이래 88년간 이어온 동아일보는 17일자로 지령 2만7000호를 맞는다. 일제강점기 4차례의 정간과 발매 정지, 기사 압수를 수시로 당했고 1940년 8월 10일 지령 6819호를 끝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되기도 했으나 동아일보의 지령은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광복 이후 1945년 12월 1일 복간된 뒤 이승만 정부와 군사 독재 시대에도 기자 구속, 검열, 발간 정지, 광고 탄압 등 고초를 겪었지만 동아일보는 한 호씩 쌓이면서 역사의 기록이 됐다. 동아일보 2만7000호를 약 10년 치에 해당하는 3000호 씩으로 나눠 당시 1면 기사를 통해 동아일보와 근현대사를 조망한다. 》
기사 건수 220∼230건, 글자 수 16만∼18만 자. 56면을 기준으로 하루치 동아일보에 실리는 기사량이다.(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 내 신문박물관에 전시된 ‘신문해부도’ 기준)
한 면당 무게는 인쇄된 상태로 약 5g이고, 하루치 56면은 약 280g(잉크와 인쇄 때 첨가되는 수분 포함)이다. 라면 2개 정도의 무게인 하루치 56면에 게재되는 기사량은 200자 원고지로 800∼900장 분량이다. 요즘의 장편소설 한 권에 해당된다. 지령 2만7000호를 맞아 동아일보를 숫자로 풀어본다.
○ 전 25권 ‘토지’ 196질에 이르는 정보량
지령 1호인 창간호부터 2008년 5월 17일에 발행되는 2만7000호까지 발행 면수를 합하면 약 38만560면에 이른다. 한 장씩 쌓으면 250cm에 이른다. 그 안에 담긴 정보량은 엄청나다. 지금까지 동아일보를 통해 전달된 기사는 약 156만3080건, 글자 수는 12억2328만 자이고 사진은 87만6000장이다. 원고지로는 611만6400장으로 전 25권인 대하소설 ‘토지’를 196질이나 만들 수 있는 분량이다.
○ 신문 정보량의 역사
신문의 역사는 정보량의 역사이기도 하다. 4면 발행 시절의 기사 건수는 평균 16건, 글자 수는 1만1500자 정도였다. 원고지로는 약 60장이다. 8면이 발행되던 때는 평균 32건의 기사가 게재됐다. 글자 수는 2만3000자, 원고지로는 120장 분량에 이른다. 16면이 나오던 때의 기사 건수는 평균 63건, 글자 수는 4만6000자, 원고지로는 230장. 32면에 이르면 평균 기사 건수 126건, 글자 수는 9만1500자, 원고지로 460장이었다. 56면 현재 하루치 신문에 들어가는 단어의 수는 평균 1만4077개. 한자 단어가 9068개로 가장 많고 순한글 단어는 2077개, 외국 문자와 숫자, 약물 등이 2235개이다.
○ 신문의 키와 몸무게는?
신문 한 면은 가로 39.4cm, 세로 54.6cm다. 기술의 발달로 신문 용지는 가벼워지고 얇아지는 추세다. 1970, 80년대 신문 용지 1m의 무게는 54g이었지만 현재는 46g이다. 신문의 두께도 1970년대에는 0.0075mm였지만, 지금은 0.0064∼0.0066mm다. 56면을 기준으로 하루에 사용되는 신문 용지는 570t. 이 용지를 다 모아 늘어놓으면 7829km에 이른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9번 오가고도 남는 거리다.
○ 사진과 광고
하루치 56면 신문에 실리는 사진은 130장 안팎이다. 사진 기자들이 하루에 찍는 사진은 3000∼4000컷. 이 중 30컷 정도가 선별돼 다음 날 신문에 실린다. 이 밖에 국내외 통신사에서 매일 들어오는 500여 컷, 사내 데이터베이스(DB)에 보관된 420만 장의 자료사진 중에서 골라 게재한다. 하루치 광고량은 약 120건에 이른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일장기 말소… 백지광고… 아하 이랬었구나”
본사 신문박물관 유치원생서 외국인까지 발길 잇달아▼
“여기에 일장기가 있다면 여러분 기분이 어때요?”(학예연구원)
“나빠요!”(아이들)
“그래서 동아일보 기자 아저씨들이 일장기를 없앴지요.”(학예연구원)
10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 내 신문박물관(프레시움·PRESSEUM). 첫 서울 나들이에 나선 전남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 초등학생 11명이 ‘손기정 선수 일장기 삭제 사건’을 들으며 눈을 반짝였다.
학예연구원이 1936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에서 손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을 보도하며 앞가슴의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가리키자 아이들은 일제히 얼굴을 내밀었다.
장승민(12·금산초교 6학년) 군은 “일장기를 지운 기자들이 총독부에 끌려가 고생했다는데 용기 있는 분들이었던 것 같다”며 자랑스러워했다.
신문박물관에는 1883년 한성순보 창간에서 2000년에 이르기까지 한국 신문이 걸어온 100여 년의 역사와 파란만장한 한국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살아 있다. 80여 년 동안 일제의 폭압과 독재정권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한국 언론이 걸어온 길을 묵묵히 앞장서 왔던 동아일보의 발자취도 담겨 있다.
2000년 12월 15일 설립된 이래 신문박물관을 찾은 관람객은 지난해까지 34만4045명. 매년 관람객 수가 늘어 2007년에는 6만8121명으로 2006년에 비해 35%가량 급증했다.
관람객 층도 다양해졌다.
유치원생부터 대학생까지 학생의 발길이 늘어나며 관람객의 연령도 한층 낮아졌고, 아이들의 손을 잡고 나들이 오듯 찾는 가족도 많아졌다. 외국인도 자주 눈에 띈다.
동아일보지령 2만7000호 발행을 하루 앞둔 16일 신문박물관을 찾은 벨기에인 그레고리 림펜스(32·연세대 어학당) 씨는 “어학당에서 열리는 ‘언론의 자유’ 좌담회를 준비하기 위해 들렀다”며 “동아일보가 언론의 자유를 지키려고 투쟁한 것을 들었다”고 말했다.
관람객들은 한국 언론의 역사를 접하며 미래를 꿈꾸고 돌아가기도 한다.
이날 신문박물관을 견학 온 명지대 ‘언론과 사회’ 강좌 수강생 30여 명은 1974∼1975년 동아일보 백지 광고 사태와 최루탄과 화염병이 날아다니던 1980년대 민주화 시위 현장에서 생생한 보도를 위해 노력한 본보 기자들의 노력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1975년 12월 26일자 동아일보 백지광고를 유심히 지켜보던 민경인(19·북한학과 2학년) 씨는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했던 동아일보가 항상 그 모습을 지켜가길 바라고, 나 또한 그런 기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홍수영 기자 gaea@donga.com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영상 취재 : 김재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