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언론은 건국 60주년 동안 한국 사회에 어떻게 이바지를 해왔고 정치권력과 어떤 관계를 맺어왔을까. 대한언론인회는 19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건국 60주년 언론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연다. 이번 세미나에서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대한민국 건국시기 언론의 역할’을, 남시욱 세종대 석좌교수는 ‘산업화 민주화 과정에서의 언론의 역할’을 발표한다. 이들은 한국 언론이 4·19혁명과 1987년 6월 민주항쟁 등 민주주의 발전의 기폭제가 됐으며 1960년대 이후 수출 중심의 경제개발에 협력해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역대 정권의 언론탄압 속에서 굴복하거나 유착한 부끄러운 모습도 있다고 지적했다. 다음은 발제문 요약.》
▽‘대한민국 건국 시기 언론의 역할’=광복 이후 6·25전쟁까지의 언론상에 대해 미군정이 부여한 언론자유 속에서 언론사가 난립하고 좌우익 언론의 정쟁과 대립이 심화됐다.
미 군정은 초기 누구나 신문을 발행할 수 있도록 등록제를 실시하고 일제강점기 언론 탄압 관련 법을 폐지하는 등 전면적인 언론 자유화를 시도했다. 이에 따라 ‘조선인민보’ ‘해방일보’(공산당 기관지) 등 좌익계 신문이 광복 직후 발행됐고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도 좌익계 인사들이 접수하면서 해방정국 초기의 여론 주도권을 좌익계가 선점했다. 좌익 진영은 건국준비위원회를 반대하는 자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배반하는 것이며 공산당을 반대하면 ‘친일파 민족반역자’로 몰아세웠다.
이 시기 언론은 사실상 정치인 정치세력의 선전지처럼 당파성이 강했고 기사의 허위 과장 왜곡도 다반사였다. 이에 따라 언론은 건전한 여론을 형성하는 기관이 아니라 정쟁을 부채질하는 도구였다.
미 군정은 1946년 5월 군정법령 88호를 공포해 신문 발행을 허가제로 전환해 신문의 정간 폐간의 행정처분이 가능하도록 했다.
군정의 조치로 좌익 언론이 쇠퇴하고 1948년 8월 정부 수립 무렵에는 우익 언론이 주도권을 차지했다. 이후 6·25전쟁 전까지 언론 상황이 정상화되면서 인쇄 시설 등이 가장 좋았던 서울신문을 비롯해 동아 조선 한성일보와 경향신문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미군정의 조치는 공산당의 득세를 막는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으나 지나친 간섭이라는 양면적인 모습을 띠게 됐으며 미 군정은 언론 자유와 통제라는 극단적 유산을 동시에 남겼다.
▽민주화 산업화 과정에서의 언론의 역할=이승만 정부는 취약한 정치기반을 강화하기 인해 경찰을 기반으로 한 권위주의 통치를 실시했고 경향신문 폐간과 언론인 투옥 등 언론을 탄압했다. 언론은 1960년 3·15 부정선거를 대대적으로 보도해 4·19혁명의 기폭제가 돼 이 정부 붕괴의 공동 주역이 됐다. 박정희 전두환 정부의 군사독재 시절엔 검열과 언론인의 고문 구속 등이 빈발했다. 언론사상 유례없는 광고탄압과 언론통폐합으로 언론인 900여 명의 해직 사태가 벌어졌다. 1987년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언론의 집요한 추적보도가 6월 민주항쟁을 촉발해 민주화의 결정적 전환점을 만들었다.
김대중 정부는 언론사 세무조사로 메이저 언론에 수백억 원의 추징금을 부과하고 사주를 구속시켰다. 만약 사주들이 교도소에 가지 않으려고 권력 앞에 무릎 꿇었다면 현 언론 상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이념 대결’의 요소까지 포함되며 권언 갈등이 더욱 심해졌다. 노 정부는 보수 언론 약화를 위해 신문법 개정을 비롯해 신문발전위원회 신문유통원 설립 등 법적 제도적으로 압박을 가했다. 기자실 폐쇄라는 극단적 조치도 불사했다. 또 KBS 등 친정부 매체를 통해 기회가 닿을 때마다 주류 신문을 공격했다.
언론이 박정희 정부와 정치적으론 불화했지만 ‘조국 근대화’의 슬로건을 내건 경제개발엔 협조적 자세를 취해 근대화에 기여했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