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죽음은 당연한 것… 지금 인생이 너무 아름다워

  • 입력 2008년 5월 24일 03시 01분


故박경리 선생 마지막 산문 ‘물질의 위험한 힘’

《5일 타계한 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쓴 에세이가 나왔다.

23일 나온 문예계간지 ‘아시아’(발행인 이대환) 여름호에는 박 선생의 ‘물질의 위험한 힘’이 실렸다.

박 선생은 이 원고를 3월 중순 기고했으며 한 달 뒤 병상에서 구술로 마무리했다고 아시아 측이 전했다.

이 글에는 물질 만능 세태를 경고하고 생명을 소중히 하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 전문을 싣는다. 》

죽지도 살지도 않는 물질의 마성적 힘이야말로 얼마나 무서운가…

최근에 나는 식중독을 두 달간 앓았습니다. 처음에는 식중독인 줄 모르고 한 달이나 지내다 보니 기력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오래 앓아온 고혈압과 당뇨병으로 눈도 나빠지고 병이 여러 가지 겹치다 보니 몸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되도록이면 병원에 가지 않고 견디려고 하는데, 그러다 보니 병이 더 심하게 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살 만큼 산 사람으로서 자꾸 아프다고 말하자니 한편 민망한 일이기도 합니다.

몸이 아프면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일을 못하는 것입니다. 몸이 쇠약해지면 들지도 못하고 굽히지도 못하니 괴롭기 짝이 없습니다. 일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일은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근원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일이 보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프다는 것, 죽는다는 것은 생명의 본질적인 작용인 일을 못하는 것이기에 절망적입니다. 죽음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에 대해서 사람들은 두 가지로 추측합니다. 하나는 죽음과 더불어 생명이 완전히 물질화된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혼이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느 쪽으로 생각하든 죽음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일이기에 두려운 것이 됩니다. 나는 죽음을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는 해도 아무리 발버둥친다 한들 죽음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살아온 연륜에서 터득한 내 나름대로의 진리입니다.

세월이 흘러서 나이도 많아지고 건강도 예전만 못하니 세상을 비관하고 절망을 느낄 법도 한데 나는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인생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문학에 일생을 바쳐 온 사람인데도 시간이 흐를수록 문학을 자꾸 낮춰 보는 시각을 갖게 됩니다. 나는 평소에 어떤 이데올로기도 생존을 능가할 수 없다고 말해왔습니다. 글을 쓰는 행위는 가치 있는 일이지만 살아가는 행위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습니다. 요즘에는 그러한 생각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살아 있는 것, 생명이 가장 아름답다는 생각이 요즘처럼 그렇게 소중할 때가 없습니다.

비단 인간의 생명뿐 아니라 꽃이라든가 짐승이라든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생명은 다 아름답습니다. 생명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능동적이기 때문입니다. 능동적인 것이 곧 생명 아니겠습니까. 세상은 물질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피동적입니다. 피동적인 것은 물질의 속성이요, 능동적인 것은 생명의 속성입니다.

나는 요즘 피동적인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낍니다. 아무리 작은 박테리아라도 생명을 가지고 태어나서 꼭 그만큼의 수명을 누리다가 죽습니다. 반면에 피동적인 물질은 죽지도 살지도 않습니다. 이 죽지도 살지도 않는 마성적인 힘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인간이 도저히 대항할 수 없는 이 마성적인 힘이야말로 얼마나 무섭습니까. 대량살상무기라든지 지구 온난화처럼 인간에게 해악을 끼치는 직접적인 힘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나는 이 피동적인 물질 자체가 가진 영원함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건드리지만 않으면, 또는 잘 다스리기만 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의지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무 자체, 이 무로서의 물질 자체는 역으로 어떤 일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우리는 민족성이 희석되어 가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옛날에 일본의 지배를 받을 때도 일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습니다. 나의 고향인 통영에 한 진사 집안이 있었는데, 그 집 딸들 중에 둘째 딸이 시집을 갔다 못 살고 돌아와서 일본 남자와 동서(편집자 주: ‘同棲’로 동거의 의미)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게 통영에서 유일한 경우였는데, 양반 집안에서 남부끄럽다고 가족들이 그녀를 아주 매몰차게 구박하고 홀대했던 일이 기억납니다. 그런데 요즘 세태는 어떻습니까. 도시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농촌 같은 데서도 국제결혼을 흔하게 보게 됩니다. 내가 사는 마을에서도 태국 여자가 한국 남자와 혼인해서 살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요즘은 지구촌 시대라 해서 하루 만에 지구 반대편까지도 가는 세상이니, 한국 사람들의 의식도 많이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민족성 대신에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따른 대립이 크게 부각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나간 민족주의 시대에는 나와 민족의 생존을 위해서, 내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 싸웠습니다. 그것은 높은 도덕률과 가치관을 요구하는 면이 있었습니다. 우리 어머니를 위해서, 아버지를 위해서 싸운다는 혈연적인 관념이 개입되어 있었습니다. 반면에 현대의 사람들은 이해관계 중심으로 살아가면서 그 같은 도덕률이나 가치관 대신에 건조하고 즉물적인 삶을 영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삶이 좋다면야 할 말이 없겠는데, 물질이 개입되어 있으니 좋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미래가 어둡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세계가 활짝 열려 있어도 주판알을 튀기며 제 잇속만을 따지게 되니 더 비정한 면이 있습니다.

정신적 가치 대신에 물질이 힘을 발휘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어렵습니다. 자기 자신이 자기를 위해 살아가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를 위한다는 것은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는다는 뜻이 아니라 자존심을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존심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귀하게 받드는 것을 말합니다.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회주의나 자본주의나 모두 물질에 들린 삶을 살아가는 체계입니다. 스스로 멈출 줄 모르는 물질적 메커니즘에 사로잡힌 세계입니다. 나 역시 신문도 읽고 가끔 텔레비전 방송도 봅니다만 내가 한적하니까 하는 일이지 물질에 편향된 뉴스가 나의 삶에 커다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상업적인 사고를 버려야 합니다. 간혹 상업적인 사고를 가진 문학인들을 볼 수 있는데, 진정한 문학은 결코 상업이 될 수 없습니다. 문학은 추상적인 것입니다.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컵 같은 것이 아닙니다. 손에 잡히지 않는 정신의 산물을 가지고 어떻게 상업적인 계산을 한단 말입니까. 나는 독자를 위해서 글을 쓴다는 말도 우습게 생각합니다. 독자를 위해서 글을 쓴다면 종놈 신세 아닙니까. 독자들 입맛에 맞게 반찬 만들고 상차림을 해야 하니 영락없는 종놈 신세지 뭡니까. 문학은 오로지 정신의 산물인데, 그렇게 하면 올바른 문학이 탄생할 수 없습니다. 나는 출판사에서 저자 사인회를 하는 것도 탐탁지 않게 생각합니다. 방송국에서 가끔씩 출연 섭외가 들어오기도 하는데, 카메라를 의식하면서 이야기해야 하는 이중성 같은 게 느껴져서 거의 거절하고 맙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의 이중성을 볼 때처럼 기분 나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대신에 나는 내 영혼이 자유로운 시간을 더 얻는 기쁨을 누립니다. 조금이라도 자유롭게 살고 싶습니다. 물질만능주의에 따른 명예나 돈 같은 것은 별것 아닙니다. 자기가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최고입니다. 나의 삶은 내가 살아가는 그 순간까지만 내 것이지 그 후에는 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요즘 나는 시를 쓰고 있습니다. 예순 편 정도를 추려서 시집을 내려고 생각합니다. 생애 마지막 작업이라 생각하고, 가족사 같은, 내가 잃어버렸거나 잊어버린 일들을 담아내려고 합니다. 한평생 소설을 써 온 내게 시는 나의 직접적이고 날것 그대로의 순수한 목소리를 지닌 것입니다. 소설도 물론 그 알맹이는 진실한 것이지만, 목수가 집을 짓듯이 인위적으로 설계를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같은 돌멩이라 해도 큰 것과 작은 것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모든 존재는 질적으로 동등합니다. 다만 요즘의 내가 자연스럽고 자유스러운 양식에 더 이끌리고, 물질적이고 인위적인 것의 위험한 힘을 더욱 경계하게 되는 것은 나이를 많이 먹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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