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포효’ A+ ‘그늘 없는 웃음’ D -
①영어대사 발음은?=비는 높은 수준의 영어발음을 보여준다. “No. Please(제발, 그러지 마세요)”나 “Let's go(가자)”처럼 짧은 대사는 물론이고 “Thank you. You saved my life(고마워. 네가 내 목숨을 구했군)”나 “I don't know what you're talking about(난 네가 무슨 소릴 하는지 영 모르겠군)”과 같은 짧지 않은 대사에서도 매끈한 발음이다.
특히 “No(안 돼)”를 “노우”라 하지 않고 “녜오우”라고 발음하거나 “family(가족)”를 “패밀리”가 아닌 “훼멀리”라 하는 것, 그리고 “morning(아침)”을 “모닝”이 아닌 “모올니잉”이라고 목구멍 안쪽까지 혀를 돌돌 말아 발음하는 대목은 본토 발음을 방불케 한다. 비는 “Musha's price is an insult to five generations of our family(무샤가 제시한 가격은 5대에 걸쳐 이어온 우리 가문에 대한 모욕이야)” 같은 긴 대사도 청산유수로 해낸다. 영화 대본만 ‘주입식’으로 달달 외운 게 아니라 평소 장기적 안목을 갖고 ‘몰입식’으로 영어공부를 해 왔다는 증거다.
두려움… 분노… ‘지르는’ 연기 발군
②감정 연기는?=비는 두려워하는 감정(사진①)과 분노하는 감정(사진②) 표현에선 수준급이다. 이런 연기는 업계 전문용어로 ‘지르는 연기’라고 하는데 슬퍼서 우는 연기와 더불어 비교적 쉬운 연기에 속한다.
지르는 연기에 있어 비는 발군이다. 비가 “잘난 척 그만해(Stop showing off)!”라며 분노를 터뜨리면서 스피드 레이서에게 주먹을 날리는 장면(사진③)을 보자. 수사자가 포효하듯 비가 뿜어내는 강력한 카리스마는 184cm의 훤칠한 키와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면서 상대 배우인 에밀 허시(왼쪽·‘스피드 레이서’ 역)나 매슈 폭스(가운데·‘레이서 X’ 역)를 압도한다.
그러나 문제는 ‘지르는’ 감정이 아닐 때 비가 구사하는 표정. 비는 자신을 최고 스타의 자리에 올려놓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한 ‘해맑은 웃음’을 영화에서도 보여주는데(사진④), ‘나 맑아요. 나 순진해요’ 하고 말하는 듯한 이 표정은 영화에서 요구되는 ‘토고칸’의 캐릭터를 고려할 때 대단히 아쉬운 대목이다. 왜냐하면 토고칸은 본디 선하고 도덕적인 본성을 타고났지만 가문을 살리기 위해 주인공인 스피드 레이서를 속여야 하는 애꿎은 운명에 맞닥뜨린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런 입체적인 내면을 가진 토고칸은 환호하는 표정 속에도 어딘지 모를 고통과 속죄의 마음이 묻어나야 했으나 비의 연기는 직설적이고 평평했다.
비의 연기가 강렬했음에도 주인공과의 감정적 교류가 약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 한 인터뷰에서 비가 “감독이 촬영하면서 절대 미소를 보이지 마라, 카리스마 넘치게 연기해 달라는 등 다양한 주문을 했다. 왜 그래야 하느냐고 묻자 ‘다 이유가 있다. 나중에 다(영화 속에서) 설명된다’고 했다”고 밝힌 내용으로 유추해 볼 때 토고칸이 가져야 할 복합적인 내면에 대해 워쇼스키 형제 감독과 나눈 의사소통이 부족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비는 ‘레이서 X’ 역을 맡은 폭스의 연기를 연구할 만하다. 주인공인 스피드 레이서가 “내가 왜 이런 위태로운 일을 계속해야 하죠?” 하고 외치자 “미안. 그건 네 스스로 알아내야 해. 그날이 굉장히 기다려지는군”이라고 대답할 때 그가 보여주는 표정(사진⑤)을 보자. 냉소적 웃음에선 섬뜩한 날카로움과 더불어 인간적인 고민과 쓸쓸함이 읽힌다. 이런 표정은 레이서 X가 (여기서 다 밝힐 순 없지만) 엄청난 비밀을 내면에 품고 있는 인물이란 사실을 암시한다.
“덜 보여주는 것이 더 보여주는 것”
③비에게 남겨진 숙제는?=한낱 마카로니웨스턴의 단골 주연이었다가 말년 들어 위대한 영화감독으로 변신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절제의 미학’을 강조하면서 이런 명언을 남겼다. “덜 보여주는 것이 결국 더 보여주는 것이다.” 희로애락(喜怒哀樂) 중 어느 한 가지가 아니라 이런저런 감정이 복잡한 비율로 뒤섞인 ‘움직이는’ 표정. 이것이 월드스타 비에게 남겨진 숙제가 아닐까. 다음 작품에선 그에게 위대한 무표정을 기대해본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