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고양시 일산에서 서울역으로 출근하는 이지현(28) 씨는 이달 초 버스 밖을 바라보다 어리둥절해졌다.
숭례문 화재 현장에 어찌된 일이지 불에 타지 않은 숭례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씨는 차창 밖으로 시선을 집중하고 나서야 숭례문 가림막 외벽에 붙은 실사 사진이라는 점을 알아챘다.
이 씨를 헷갈리게 한 건 ‘디지털 프린팅’이라는 최신 인쇄 기술이었다.
지난해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가로 60m, 세로 20m의 세계 최대 옥외 광고가 내걸렸다.
영국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홈구장 외벽의 박지성이 등장하는 광고물,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서울시청 주변을 메운 대부분의
옥외 광고물도 디지털 프린팅으로 만든 작품이다.》
○ 잉크젯 프린터와 원리 비슷
2000년대 초반부터 선보인 디지털 프린팅은 컴퓨터 파일 형태로 만들어진 그림을 프린터와 직접 연결해 출력하는 시스템이다. 필름을 만들어 인쇄하는 전통적인 아날로그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무실이나 가정에서 쓰는 잉크젯 프린터와 비슷한 원리다.
디지털 프린팅은 필름이 필요 없어 인쇄 공정을 절반으로 단축했다. 게다가 지난해 국내 한 업체에 도입된 디지털 프린터에는 잉크를 뿌리는 ‘프린터 헤드’가 무려 150개 설치됐다. 구형 디지털 프린터의 헤드는 16∼32개. 촘촘히 설치된 프린터 헤드가 잉크를 한꺼번에 쏟아내기 때문에 출력 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다.
이 같은 기술로 숭례문 주변의 대형 가림막에 붙은 사진은 인쇄부터 시공까지 총 7일이 걸렸다. 가림막 넓이는 농구장 9개에 해당하는 3780m². 필름을 뽑는 전통적인 방식대로라면 40일이 걸렸을 것이다.
○ 차세대 잉크 쓰면 수명 획기적 연장
현재 국내에서 디지털 프린터로 출력한 제품의 수명은 보통 2년이다. 아날로그 제품과 비슷하거나 조금 짧다. 그러나 내년에는 확 달라진다. 제품의 수명을 좌우하는 차세대 잉크가 들어오기 때문이다.
현재 국내 디지털 프린터에는 ‘UV경화잉크’가 많이 쓰인다. 프린터 밖으로 인쇄물이 나오자마자 강력한 자외선이 나오는 전등 아래를 지나면서 단 1초 만에 굳는다. 숭례문 가림막에 붙은 인쇄물에도 UV경화잉크가 쓰였다.
그러나 내년 상반기에 들어올 ‘라텍스 잉크’는 옥외에서 최대 3년, 표면에 코팅을 하면 5년을 견딘다. 간헐적으로 볕이 드는 옥내에서는 최대 10년까지 제 색을 유지할 수 있다.
라텍스 잉크에는 미세한 알갱이 형태의 천연고무가 섞여 있다. 이 고무가 인쇄 대상물 안쪽에 깊이 스며들어 잉크와 인쇄 대상물이 착 달라붙도록 한다. 일종의 접착제인 셈.
김종태 한국HP 이미지프린팅그룹 과장은 “UV경화잉크와 라텍스 잉크는 휘발성유기화합물인 솔벤트 방출량이 적어 환경오염 측면에서도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 다품종 소량 생산에 적합
디지털 프린팅은 다품종 소량 생산에 유리하다. 수요가 변했을 때 디자인을 신속히 변경할 수 있어 새 제품 생산까지 걸리는 기간이 짧아진다.
이 특징은 의류 업계에서 각광받고 있다. 소비자의 다양한 요구에 따라 수많은 옷을 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유행에 민감한 패션의류 업계에서 이 기술에 주목하고 있다.
한국생산기술연구원 디지털가공팀 박윤철 박사는 “현재 세계 의류의 20% 정도가 디지털 프린팅으로 색을 입히고 있다”고 말했다.
이정호 동아사이언스 기자 sunris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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