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소련을 이긴 러시아 음악, 모스크바 백야를 수놓다

  • 입력 2008년 6월 5일 03시 03분


젊은 날의 로스트로포비치(앞)와 갈리나 비시넵스카야 부부. 사진 제공 최정호 석좌교수
젊은 날의 로스트로포비치(앞)와 갈리나 비시넵스카야 부부. 사진 제공 최정호 석좌교수
모스크바는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다. 오후 10시까지도 밖은 밝고 6월의 거리에 라일락과 마로니에 꽃이 이제 한창이다. 백야의 북국에 온 걸 실감했다.

짧은 일정인데도 구경 복 많은 나는 희한한 객석에 자리할 수 있었다. 첫 공연은 2002년 문을 연 갈리나 비시넵스카야 오페라센터의 차이콥스키 가극 ‘오네긴’.

극장 이름을 듣는 순간 귀가 번쩍했다. 갈리나 비시넵스카야라니!? 그녀는 작년에 타계한 로스트로포비치의 부인이요, 소비에트 시대에 남편과 함께 국외로 추방된 볼쇼이 오페라의 프리마돈나.

나는 1978년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로스트로포비치가 워싱턴 심포니를 이끌고 벤저민 브리튼의 ‘전쟁 진혼곡’을 연주했을 때 갈리나가 소프라노 파트를 부른 걸 마지막으로 들었다.

갈리나도 남편에 앞서 타계했나? 그녀 이름을 얹힌 오페라센터가 생기다니. 안내원에게 물어보니 갈리나는 81세로 아직 건재, 오늘 밤 극장에 나올지도 모른다고 귀띔해준다.

오페라센터는 좌석이 200석은 될까. 서울의 LG아트센터의 약 6분의 1 크기? 내가 앉은 소탈하기 이를 데 없는 2층 중앙의 발코니 밑 1층 객석은 겨우 여섯 줄. 여태껏 본 극장 중 가장 작은 초미니 ‘포켓 시어터’다. 그러다 보니 무대가 코앞이요, 가수의 숨소리까지 들리는 마치 ‘하우스 콘서트’를 구경하는 느낌.

공연이 시작되기 전 내 앞의 비어 있던 자리에 검은 의상의 노부인이 착석했다. 갈리나가 나타난 것이다!

무대 장치는 분위기 있는 사진을 모노크롬으로 확대해서 처리한 것이 오히려 앤티크의 효과를 냈고 공연의 수준은 일급이었다. 몇 차례 커튼콜이 있은 다음 무대 위의 가수 지휘자 연출자 등이 객석의 발코니를 향해 박수를 치자 모든 관객도 돌아서서 내 앞의 갈리나를 향해 갈채를 보낸다.

다음 날은 모스크바음대 강당의 차이콥스키 국제음악콩쿠르 50주년 갈라 공연. 그렇다면 이 국제콩쿠르의 시작이 1958년. 당시 1등 수상자가 미국 피아니스트 밴 클라이번. 동서 냉전시대의 일대 센세이션이었다. 나는 이 뉴스를 신문에 실으면서 ‘음악은 철의 장막을 넘어’라는 제목을 얹힌 기억이 난다. 그 후 여기서 우승한 5명의 독주자를 초빙한 이날 갈라 공연은 카를 마리아 폰 베버의 ‘오베론’ 서곡에 이어 브람스, 베토벤의 듀오 및 트리오 콘체르토. 러시아 것 없이 독일 작곡가만의 레퍼토리. 차이콥스키 컨서버토리와 모스크바와 러시아의 개방성, 세계성을 실감했다.

귀국 전 나는 프로코피예프와 쇼스타코비치, 오이스트라흐와 리히터 등이 묻힌 유명한 노보데비치 사원 묘지를 찾았다. 그곳엔 아직 묘비가 완성되지 않은 채 소련에서 추방됐던 로스트로포비치의 가묘가 옐친의 무덤에 맞먹는 중심부에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본보 객원大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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