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견 물리학 이론을 반박하는 연구논문 내용처럼 보이지만 이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1964년 6월 9일 린든 존슨 대통령에게 제출한 보고서의 한 대목이다. 가려진 부분은 ‘공산주의’라는 네 글자다.
이 보고서는 CIA 내 ‘현자(賢者)들의 모임’으로 불리는 국가정보평가위원회가 3개월의 검토 끝에 만든 것. 그해 3월 존슨 대통령이 “라오스와 베트남이 공산세력 아래 들어가면 나머지 동아시아 국가들도 반드시 그 뒤를 따르는 것이냐”고 물은 데 대한 답변이었다.
존슨 대통령의 질문은 당시 미국 대외정책의 골간이었던 ‘도미노 이론’이 과연 타당한지 점검해보라는 요구였다. 도미노 이론은 만약 베트남이 공산주의 세력에 넘어가면 나머지 동아시아 태평양 국가들도 도미노처럼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라는 논리.
도미노 이론을 처음 공식적으로 언급한 사람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었다.
그는 1954년 4월 “인도차이나는 도미노의 첫 줄이다. 그 마지막은 어디겠느냐”며 ‘넘어지는 도미노’를 거론했다. 인도차이나가 무너지면 버마(미얀마), 태국, 인도네시아가 다음이며 이후 일본, 대만, 필리핀은 물론 호주와 뉴질랜드까지 위험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인도차이나를 코르크(병마개)에 비유하기도 했다. 병마개가 열리면 병 안에 있는 인구 수억 명의 주변 지역이 위협을 받는다는 것. 이후 도미노 이론은 공산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하고 미국의 베트남 개입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널리 사용됐다.
CIA 보고서는 그렇게 확고한 원칙처럼 굳어진 도미노 이론에 뒤늦게 반론을 제기한 것이었다. 이 보고서는 “라오스와 베트남에 이어 공산세력에 넘어갈 나라는 아마도 캄보디아가 유일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또 이 보고서는 “베트남과 라오스가 무너지면 이 지역에서 미국의 위상에 심대한 타격이 될 것이지만 오키나와 괌, 필리핀, 일본에 미군 기지들을 보유하는 한 미국은 중국과 베트남의 침략을 저지할 충분한 힘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 보고서는 이미 도미노 이론에 따라 채택된 대외정책 기조를 바꿀 수는 없었다. 존슨 대통령도 CIA의 분석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는 얼마 뒤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 아래 대규모 미군 병력의 베트남 파견을 결정했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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