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문화관’ 가보니… “선생님 사랑합니다” 현수막이 마중

  • 입력 2008년 6월 11일 03시 01분


‘박경리 선생님 사랑합니다.’ 지난달 토지문화관(1999년 개관)에 머물던 15명의 작가가 건 현수막. 2001년부터 작가들을 위한 창작 집필실로 사용된 토지문화관에는 총 200여 명의 작가가 다녀갔다. 원주=박선희 기자
‘박경리 선생님 사랑합니다.’ 지난달 토지문화관(1999년 개관)에 머물던 15명의 작가가 건 현수막. 2001년부터 작가들을 위한 창작 집필실로 사용된 토지문화관에는 총 200여 명의 작가가 다녀갔다. 원주=박선희 기자
박경리 선생 타계 한달여

주인 잃은 텃밭엔 고춧잎만 푸르러…

강원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 토지문화관 텃밭엔 그가 묶어 기르던 고추의 잎이 눈시린 초록이었다. 사택 앞 장독대엔 햇빛이 반짝였고 귀래관(작가 창작관)으로 가는 오솔길엔 오디가 검붉게 익고 있었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이 타계한 지 한 달여가 지났다. 최근 둘러본 이곳은 초여름 초목이 싱그럽게 물들고 있었다. 정문에 ‘박경리 선생님 사랑합니다’라고 쓰인 연두색 현수막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소설가 윤흥길 권여선 씨 등 지난달 창작관에 머물던 15명의 작가가 원주에서 노제를 지낼 때 함께 준비한 것이다. 지금은 10명의 작가가 머물고 있으나 주말 외출에 나서 문화관은 한적했다. 딸 김영주 관장이 혼자 문화관을 지키고 있었다.

○ 타계 2년 전부터 가족사 다룬 시집 준비

여러 차례 인터뷰를 고사했던 김 관장은 “누군가가 찾아와 묻고 환기시킬 때에야 어머니가 곁에 없다는 걸 느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셨을 땐 이미 호흡기를 착용해 말씀을 못하셨어요. 그런데 한 일간지에 임종 때 ‘토지로 돌아간다’고 말하셨단 웃지 못할 기사도 나왔죠. 임종 땐 가족들만 있었는데 자리에 없던 사람들이 한 이야기도 많습니다.”

사십구재가 끝나는 22일에 맞춰 나오는 유고 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가제·마로니에 북스)도 박 선생이 자신을 둘러싼 헛소문 때문에 타계하기 2년 전부터 쓴 것이라고 한다.

김 관장은 “한 평론가가 근거 없이 어머니가 불륜의 자식이란 글을 쓰자 당신 어머니의 삶이 모욕당하신 데 충격을 받아 가족사에 대한 시를 쓰기로 결심하신 것”이라고 유고 시집을 설명했다.

당시 고인의 병을 알고 있었던 건 김 관장뿐이었다. “어머니는 병에 지고 싶지 않으셨고 자연인 그대로 살고 싶으셨나 봐요. 김 시인(김 관장은 남편 김지하 시인을 이렇게 불렀다)이나 손자들에게 걱정스러운 눈빛을 받는 것조차 못 견뎌 하셨고 가족에게 알린 것도 싫어하셨어요.” 이 시집엔 원래 60편을 쓰려했지만 집필 도중 건강이 나빠져 ‘천성’ 등 총 39편이 수록된다.

○ 김 관장 “가셨지만 어머니 역할은 제가”

고인이 생전에 직접 담근 장아찌며 나물무침 등을 내려보냈다는 관내 식당에 들르자 식사 여부를 표시해 둔 알림판이 보였다. 윤흥길 김언수 씨 등 문인들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작가들이 머무는 창작관 매지사에서 하룻밤 머물렀다. 창가에 붙여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진정한 예술…그곳은 영혼 그 자체의 세계이다.”(마루야마 겐지의 ‘소설가의 각오’)

다음 날 일찍 김 관장은 충북 청원군 성불사에서 사십구재를 드리기 위해 길을 나섰다. 문득 박 선생이 없는 토지문화관의 앞날이 궁금했다. 고인의 생전에 토지문화관에 다녀가지 못했던 한 작가가 ‘엄마 사랑 못 받은 미운 오리 새끼가 된 것 같다’고 했던 말을 전하자 김 관장은 빙그레 웃었다. “어머니는 가셨지만…이제는 제가 그 역할을 해드려야겠지요.”

원주=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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