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100년-사랑의 詩]김지하/‘줄탁’

  • 입력 2008년 6월 12일 03시 04분


사랑의 때는 언제인가? 여기 사랑이 탄생하는 시간에 대한 예감을 만날 수 있다. ‘저녁 몸’은 몸이 한낮의 열도를 뒤로하고 스스로 안으로 접어드는 때, 혹은 소멸의 시간을 준비하는 때, 그 시간에 ‘회음부’와 ‘가슴 복판’, ‘배꼽’과 ‘뇌’ 속에서도 ‘새파란 별’이 뜬다. 몸속 구석구석에 뜨는 별은, 몸이 바야흐로 새로운 시간의 차원에 진입하고 있음을 징후적으로 보여준다. 말하자면 몸 안에서 벌어지는 몸의 사건. “내가 타죽은 나무가 내 속에 자란다”라는 문장처럼, 죽은 몸 안에서 다른 생성이 이루어지고, 죽음 뒤에서 ‘조각달’의 존재 전환이 시작된다. 몸은 다만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몸의 시작을 준비한다.

사랑의 때는 바로 그런 순간. “그 탄생의 미묘한 때”는 하나의 몸이 다른 몸으로 전환되는 시간, 하나의 몸이 스스로 다른 몸으로 솟구쳐 나오는 시간. ‘줄탁’에서 ‘줄’이란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 안에서 껍질을 깨는 것, ‘탁’은 어미가 바깥에서 그 소리를 듣고 껍질을 쪼아 도와주는 것이다. 사랑의 몸이 태어나는 것은, 하나의 몸의 움직임과 그 움직임에 화답하는 다른 몸의 움직임 때문에 가능하다.

그것은 하나의 우주가 탄생하는 일, 죽음을 넘어 하나의 몸이 다시 부활하는 순간. 나는 당신의 몸이 변화하는 황홀한 시간, 당신의 몸과 나의 몸이 화답하고 반응하고 그리하여 다른 몸으로 전환되는 그 뜨거운 순간을 살았다. 혹은 살게 될 것이다. 그 우주적 순간 때문에, 사랑은 영원히 새롭게 탄생한다. 김지하의 깊은 서정시는 그 사랑의 순간을 섬광처럼 예지한다.

이광호 문학평론가·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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