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12월 8일.
“탕” 하는 총 소리와 함께 미국 뉴욕 다코타아파트에서 한 남자가 쓰러졌다. 그는 그룹 ‘비틀스’의 멤버 존 레넌. 마흔 살의 이 유명 가수를 힘없이 무너뜨린 것은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이라는 남자였다. 그는 존 레넌에게 총을 겨냥한 후 손을 들고 외쳤다. “나는 그의 광적인 팬이었다”라고.
1995년 3월 31일. 텍사스의 호텔 방에서 한 여인이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그는 총에 맞아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다음 날 신문에는 그의 사망소식이 실렸다. “라틴계 톱 가수 셀레나, 자신의 팬클럽 회장인 욜란다 살디바르의 총에 맞아 사망….”
너무 사랑했기에 총을 겨눌 수밖에 없었을까. 열성 팬이 없었다면 지금쯤 존 레넌과 셀레나의 음악 역사는 어떻게 됐을까. 가수를 열렬히 사랑한 팬, 그리고 그 팬들의 사랑을 먹고 사는 가수, 마치 외줄타기를 하는 곡예사처럼 이들의 관계는 아슬아슬하다.
하지만 비극이 전부는 아니다. 이런 현장도 있었다.
“꺅∼.” “뉴 키즈! 뉴 키즈….”
2008년 5월 24일 오후. 서울 중구 충무로의 한 스튜디오에 모인 30여 명의 사람들. 저마다 수십 장의 사진 자료와 현수막을 양손에 가득 들고 함성을 지른 까닭은 무엇일까? 이날은 1980년대 후반 인기를 얻었던 남성 5인조 아이돌 그룹 ‘뉴 키즈 온 더 블록’의 영상회가 있던 날. 눈가의 주름도, 바지 위로 보이는 뱃살도 아랑곳하지 않는 듯 동호회 회원들은 18년 전 ‘스텝 바이 스텝’과 ‘투나잇’ 뮤직비디오를 보며 환호했다. 22년 전 데뷔 초 앳된 멤버들의 모습부터 1994년 해체 모습, 그리고 지난달 뉴욕 록펠러센터에서 가진 14년 만의 컴백 쇼까지…. 동호회 회원들은 이들의 몸짓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이 영상회는 뉴 키즈의 국내 온라인 팬클럽 ‘신슈(Since NKOTB Walked Into My Life)’에서 주최했다. 여기엔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주부 이난순(37) 씨도 있었다.
○ 그 시절 그 아이돌에 다시 빠진 3040
“여기에 오기 위해 아이들을 친정에 맡겨 두고 왔어요.”
아홉 살, 세 살 된 아이까지 포기하고 그가 스튜디오로 온 까닭은 무엇일까. 이 씨는 “어릴 적 가장 순수했을 때 ‘뉴 키즈’는 내 모든 열정을 불태운 존재였다”고 말했다. 1986년 데뷔해 1994년 해체하기까지 열혈 팬이었던 이 씨는 이후 결혼한 뒤 잠시 팬 활동을 중단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터넷 동호회를 발견했고 지금 다시 10대 때처럼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이날 70개가 넘는 영상을 준비해 온 동호회 운영자 오창영(32) 씨와 김태환(30) 씨는 “현재 팬 카페 회원이 3200명이 넘고 가입을 희망하는 사람이 줄을 잇고 있다”고 말했다. 1980, 90년대 학창시절을 보낸 회원 대부분은 현재 30, 40대 직장인이나 주부가 돼 있었지만 그 열정은 변함없었다. 충남 공주에서 올라왔다는 주부 황일선(31) 씨는 “예전엔 부모님 모르게 숨어서 좋아했지만 이젠 떳떳하게 남편과 함께 뉴 키즈 공연 DVD를 본다”고 말했다.
나이가 몇이냐고?
지금도 비틀스는 나의 힘
‘동방신기’, ‘빅뱅’, ‘원더걸스’, ‘소녀시대’…. 지금의 10대들에게 우상과도 같은 아이돌 그룹이 있다면 3040세대에겐 과거의 아이돌 그룹이 여전히 ‘현재’처럼 숨쉬고 있다. 대부분 과거의 아이돌 그룹은 해체했거나 활동을 중단했지만 열혈 3040팬들은 오늘도 변함없이 이들이 다시 무대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들의 ‘파워’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는 4월에 있었던 그룹 ‘듀란듀란’의 내한 공연 때였다. 1980년대 ‘꽃미남’ 밴드로 전성기를 누렸던 이들을 보기 위해 이른바 ‘아줌마 부대’와 ‘넥타이 부대’로 대표되는 3040 세대들이 공연장에 나타났고 그 속에는 듀란듀란 인터넷 동호회인 ‘고 듀란듀란(Go Duran Duran)’의 운영자 박윤정(39·공예예술가) 씨도 있었다. 박 씨는 공연 전날 듀란듀란 멤버들의 내한을 맞이하기 위해 동호회 회원 30여 명과 함께 내한 환영 현수막을 만들어 인천공항에 나갔다.
공연 당일에는 듀란듀란 티셔츠부터 수건, ‘D’ 모양의 야광봉 등 총 200개의 응원 도구를 만들기도 했다. 일본이나 유럽 등 해외 공연도 서슴없이 간다는 박 씨는 “나이가 몇이냐는 핀잔도 받지만 이들을 응원하며 삶의 활력소를 얻는다”고 말했다.
○추도식부터 카피밴드까지…‘아이돌 후애(後愛)’ 시대
한번 오빠는 영원한 오빠?
1960년대 ‘비틀스’부터 1980년대 ‘꽃미남’ 아이돌 그룹이었던 듀란듀란, ‘왬’, ‘뉴키즈 온더 블록’. 1990년대 ‘엔싱크’까지. 이미 해체했거나 활동을 중단한 아이돌 그룹이 대부분이지만 이들의 팬들은 인터넷 포털사이트 카페나 클럽을 근거지로 삼아 수백 명, 수천명 씩 아직도 뜻을 같이하고 있다. 우상은 무대에서 사라졌지만 그들을 향해 외치는 3040 팬심(心)은 나이를 먹어도 여전하다.
비단 해외그룹 뿐만이 아니다. 1970년대 말 ‘산울림’, 1980년대 초 ‘송골매’ 등 아이돌 그룹 대접을 받았던 록 밴드부터 ‘소방차’, ‘듀스’ 등 해체된 국내 그룹 팬들 역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산울림 팬클럽인 ‘산울림매니아’의 경우 회원 수만 3500명이나 될 정도로 거대하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세미나실을 빌려 영상회, 카피밴드 콘서트 같은 이벤트를 벌이며 친목모임을 갖고 있다. 27년째 산울림 팬클럽 활동을 벌이는 ‘산울림매니아’ 대구지역 운영자 김미화(42·논술강사) 씨는 “아예 부부동반으로, 자녀를 데리고 오는 회원들이 많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산울림 멤버 김창익 씨가 캐나다에서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자 캐나다에 직접 가지 못한 팬클럽 회원들이 서울에서 빈소를 차려 자체 추도식을 하기도 했다.
사라진 그룹을 응원하는 이들의 활동 내용은 대부분 ‘추억’ 챙기기. 공개방송을 따라다니거나(‘공방’파) 사생활을 캐거나(‘사생’파) 하는 식이 아닌 미공개 영상을 입수해 영상회를 갖거나 그룹 멤버들의 생일을 챙기는 활동을 한다. 국내의 경우 이런 움직임이 조직화된 것은 ‘서태지와 아이들’ 때부터로 ‘서태지와 아이들 기념사업회(서기회)’라는 이름으로 매년 대규모 영상회를 열었고 팬들의 글을 모아 책을 내기도 했다.
더 적극적인 팬들은 아예 ‘카피밴드’를 만들기도 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비틀스에 빠졌다는 ‘M&B진 클리닉’의 표진인(41·정신과) 원장은 2001년부터 비틀스의 음악만을 연주하는 밴드 ‘더 애플스’를 결성해 콘서트까지 열었다. 표 원장은 “내년 8월 비틀스의 고향인 영국 리버풀에서 열리는 비틀스 페스티벌에 한국 대표로 출전하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죽지 않아! 여유로운 3040 팬덤
이러한 3040 팬덤(fandom·팬들)에 대해 당사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송골매’의 기타리스트였던 방송인 배철수 씨는 “놀랍고 고마운 일이지만 추억의 힘을 빌려 나설 수 없다”며 “팬들의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 ‘컴백’을 더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3040세대 열정은 바로 ‘여유’에 있다. 대부분 대학입시, 취업, 결혼 등으로 20대 때 잠시 팬 활동을 접었지만 시간적 여유와 재정적 수입을 가지는 30대 이후 팬심을 다시 펼치는 양상이다. 이들은 과거에 구입하지 못했던 음반이나 희귀 물품(일명 ‘레어 아이템’)들을 사는 데 돈을 아끼지 않는다. 표 원장의 경우 비틀스 관련 희귀 서적을 구하기 위해 일본까지 가서 사 올 정도며 기타와 앰프 등 비틀스가 사용했던 브랜드 악기를 구입하는 데 1000만 원이나 투자했다.
인터넷쇼핑몰 옥션에서는 비틀스 포스터(1만1000원)가 한 달 평균 150개 팔린다. 또 해외구매대행사이트 ‘이베이’에는 비틀스 멤버 4명의 캐릭터가 그려진 머그잔 세트가 1595달러(약 162만 원)에 경매로 올라와 있다.
여유로움은 회원 간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10대 시절 GMV, 핫뮤직 등 음악잡지 뒷면 ‘펜팔’ 코너나 ‘152’, ‘153’ 전화사서함으로 한두 명의 회원과 정보를 교환했다면 현재 이들은 인터넷 팬 카페 속 ‘온라인 인맥’을 통해 추억을 교환한다. 왬 인터넷 팬클럽 ‘WHAMSH’를 운영하는 직장인 이상화(27) 씨는 “정보 교환은 쉬워졌지만 과거에 비해 끈끈한 맛이 사라지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문화평론가들은 사라진 옛 그룹에 열광하는 3040세대에 대해 단순히 추억의 개념을 넘어서 3040세대가 문화적 정체성을 찾는 과정이라고 분석했다. 문화평론가 김헌식 씨는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기보다 인생에 있어 가장 화려했던 10대 때를 떠올리며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라며 “스타는 사라졌지만 과거 문화 자체를 자신의 삶과 동일시하고 일체화시키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글=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지면디자인=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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