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먹먹한 날엔 그곳에 가보자
갈매기 산동네가 情으로 맞는 곳
2층 전시장에 오르면 수묵화처럼 보이는 배병우 씨의 대형 흑백사진이 반겨준다. 고즈넉이 펼쳐진 수평선 한 귀퉁이에 보석처럼 박혀 있는 오륙도가 붓으로 그려 넣은 것만 같다. 건너편 벽을 꽉 채운 박영근의 ‘사람의 도구-부산’. 우장춘 조용필 유치환 박생광 등 부산과 연관된 인물과 상징물을 길이 9m의 회화로 연출했다.
개관 10주년을 맞은 부산시립미술관이 7월 6일까지 특별전 ‘Art in Busan 2008: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열고 있다. 부산 출신 작가들과 부산을 방문해 작업한 다른 지역 작가들, 부산의 젊은 작가와 6개 대학 등 63개팀이 참여한다. 이 도시를 아는 사람에게도, 모르는 사람에게도 부산을 새롭게 인식하는 데 이만한 전시가 없을 듯하다. 자화자찬식 기념전이 아니라 현대미술이란 프리즘을 통해 부산이란 공간과 삶, 역사성 등을 읽어내겠다는 야심 찬 목표를 꽤 뚝심있게 실천했기 때문이다.
철제 박스에 담긴 물에 자리 잡은 돌덩이로 오륙도를 재구성한 김구림, 보수동과 수정동 산복도로 등을 수묵채색기법으로 표현한 김범석, 2.4m 칠판에 흰 분필로 부산을 드로잉한 박병춘 등은 한 도시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을 보여준다. 고밀도 대형 필름으로 작업하는 안세권 씨는 10m 스크린에 빛이 많은 언덕배기 도시의 풍경이 흐르게 하고, 부산 작가 최소영 씨는 청바지와 오브제를 이용한 대형 설치작업으로 고향을 형상화했다.
이 전시에서 낡은 사진을 재구성한 작업을 선보인 안창홍 씨는 부산 출신의 중견 화가다. 30일까지 서울옥션 부산점에서 열리는 ‘안창홍 작품전’은 부산의 개인 컬렉터가 오랜 시간 애정을 갖고 소장해 온 30여 점을 공개하는 색다른 자리다. 1980년대 초기작 ‘가족’부터 양귀비 언덕을 그린 근작까지 순수한 애호가의 눈높이에서 지켜본 한 화가의 궤적이 친근감을 더한다.
바깥 문물을 발 빠르게 수용해 온 부산은 개화도 빨랐다. 전쟁 당시 마지막 피란처로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을 보듬어준 곳도 부산이었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가 그렇듯 부산에는 해양성 문화가 가질 수 있는 활력과 개방성이 있다. 많은 것이 혼합되고 섞여들면서 다양성을 유지한 것이 부산의 매력이다.”(조일상 부산시립미술관장)
그런 맥락에서 동양인 최초로 ‘내셔널 지오그래픽’지의 사진편집장을 지낸 김희중 씨가 50년 만에 처음으로 여는 개인전 ‘집으로 가는 길’이 부산에서 열린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8월 3일까지 고은사진미술관). 1950년대 한국인의 삶부터 북한과 해외, 해운대 풍경까지 선보인다. “집은 나에게 꿈속에서나 볼 수 있었던 정겨운 얼굴들이고 고국산천”이라고 얘기하는 작가에게 부산은 기꺼이 ‘집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쑥스러운 듯 도타운 인정을 투박한 사투리 속에 숨기는 사람들. 시간이 빠르게 물결치다가 문득 천천히 흐르는 곳. 오래된 기억이 스며 있는 산복도로 좁은 골목길과 우뚝 솟은 초고층 주거공간이 절묘하게 뒤섞인 도시. 전후 부산에 터를 잡고 이곳에서 작업해 온 사진가 최민식 씨는 말한다. “부산은 변화가 많은 도시다. 자갈치시장의 경우 오늘 찍고 내일 가도 똑같지가 않다.” 이처럼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표정이 이 도시를 살아 숨쉬는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부산에서>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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