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공화당 후보로 재선을 준비 중이던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백악관 측은 ‘침입사건과 정권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주장을 고수했다.
하지만 이 사건에 닉슨 대통령이 관여돼 있다는 심증을 굳힌 민주당은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맹공을 퍼부었다. 워싱턴포스트 기자인 밥 우드워드, 칼 번스타인은 내부정보원(딥 스로트: Deep Throat)의 도움을 받아 닉슨 대통령과 측근들을 궁지에 몰아넣는 특종 기사를 잇달아 터뜨렸다. 당시 미국연방수사국(FBI) 부국장 윌리엄 마크 펠트는 30여 년이 지난 2005년 ‘미국 정계의 수수께끼’였던 딥 스로트가 자신이었음을 공개한 바 있다.
또 다른 내부자의 양심선언은 단순 가택침입 사건으로 처리될 뻔했던 미국 최대의 정치스캔들 ‘워터게이트 사건’의 도화선이 됐다.
백악관 보좌관이었던 알렉산더 베터필드가 닉슨 대통령 집무실 대화 내용이 기록된 비밀 테이프(닉슨 대통령이 FBI의 워터게이트 사건 조사를 방해하라고 미국중앙정보국인 CIA에 지시하는 육성)의 존재를 폭로한 것이다. 이 테이프는 ‘결정적 증거(Smoking gun)’로 불렸다.
테이프를 공개하라는 여론과 민주당의 비난이 거셌지만 닉슨 대통령은 국가보안을 이유로 공개를 거부했다. 게다가 워터게이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지명된 특별 검사 아치볼드 콕스가 공식적인 증거로 테이프 제출을 요구하자 닉슨 대통령은 그를 해임시키는 자충수까지 뒀다.
2년여에 걸친 공방전 끝에 미국 하원사법위원회는 닉슨 대통령에 대한 1차 탄핵(사법 방해), 2차 탄핵(권력 남용), 3차 탄핵(의회에 대한 모욕)을 모두 가결시켰다.
벼랑 끝에 몰린 닉슨 대통령은 결국 미국 하원사법위원회 최종 탄핵안이 가결된 지 4일 뒤인 1974년 8월 9일 대통령 직을 사임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게이트(gate)’라는 단어는 권력형 비리 의혹, 부패 스캔들의 의미로 쓰이게 됐다. 정치인의 실수는 용서될 수 있으나 거짓말은 용서될 수 없다는 교훈과 함께.
안영식 기자 ysa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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