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SF작가의 문명과 인류에 대한 통렬한 조소
자, 이리 오시라. 여기 세상의 창조자가 있다. 창조자들 혹은 창조자 둘. 이름은 트루를과 클라포시우스. 어째 좀 만만해 뵌다. 서로 절친해 보이긴 하는데 ‘하해(河海) 같은’ 성격인진 의심쩍다. 게다가 이 둘, 로봇이다.
창조자에게 ‘신과 같은 능력’이란 표현 자체가 껄끄럽지만, 하여튼 두 로봇은 신이나 해낼 법한 재주를 가졌다. ‘N’으로 시작하는 건 뭐든 만드는 기계, 시인 기계, 완벽한 조언자 기계 심지어 악마나 에로티시즘 증폭기도 뚝딱 만들어낸다. 그런데 이 능력, 꽤 ‘근사하게’ 사고를 친다.
‘사이버리아드’는 폴란드 출신으로 세계적 SF(과학소설) 작가로 추앙받는 저자 스타니스와프 렘(사진)의 대표작. 국내에는 안드레이 타르콥스키나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동명영화 탓에 4년 먼저 나온 ‘솔라리스’(1961년)가 더 알려져 있다.
‘사이버’에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섞어 제목을 지은 이 책은 말 그대로 창조의 힘을 지닌 두 로봇의 좌충우돌 우주 여행기. 비슷한 시기에 썼음에도 솔라리스와 분위기는 우주의 대척점만큼 다르다. 솔라리스가 진지하다 못해 머리까지 아픈 철학적 탐구가 가득하다면, 사이버리아드는 문명과 인류에 대한 통렬한 조소가 담긴 유머가 전편에 걸쳐 넘실거린다.
“트루를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자신의 기술을 전부 동원해서 왕에게 완전히 새로운 왕국을 만들어주었다.…꼭 필요한 한 움큼의 배신자, 한 줌의 영웅, 한 자밤의 예언자와 선지자, 구세주와 위대한 시인 한 명씩을 던져 넣었다. 왕국의 여자들에게는 아름다움을, 남자들에게는 뚱한 침묵과 술 취했을 때의 험악한 기세를, 공무원에게는 오만과 비굴을, 천문학자에게는 별에 대한 열광을, 아이들에게는 소음을 낼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을 주었다.”(‘일곱 번째 외출 혹은 트루를의 완벽함이 소용없었던 이야기’ 중에서)
거장에게 무례한 표현일진 몰라도, 이 책 참 ‘재기발랄’하다. 작품 해설에도 나오지만 더글러스 애덤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와 비견될 만큼 엽기 가득이다. 아니, ‘은하수를…’에 여러모로 영향을 끼쳤을 게 뻔한 이 책이 더 황당하다. 동굴에 은거하며 명상하는 왕을 위해 트루를이 이야기하는 기계를 만드는 ‘게니우스 왕의 이야기 기계 세 대 이야기’에서 얘기 속의 얘기에 빠지다 보면 우주로 날아간 아라비안나이트를 만난 듯하다.
그렇다고 이 책을 만만하게 봤다간 그 역시 패착이다. 16세기 프랑스 소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에서 따왔다는 가르강티우스 효과나 고대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의 연설에서 인용한 클라포시우스의 읊조림 ‘오 시대여, 오 도덕이여’를 마주칠 때 흐뭇하게 웃어넘길 공력을 가진 이는 흔치 않다. 출판사 측에서 열심히 각주를 달긴 했지만 때때로 멍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책, 재밌다. 좀 덜 알아들으면 어떤가. 전자 시인의 ‘서정적이며 목가적이며 순수 수학의 언어로 표현된, 텐서 대수학을 사용하되 필요하면 위상수학과 고차미적분을 조금 곁들인 연애시’가 깡그리 헷갈리면 어떤가. ‘나는 그대가 내 마음에 랜덤 액세스하도록 하겠네/그대는 나에게 그대 사랑의 모든 상수를 말해주겠지.’ 이해 가는 부분에서만 웃어줘도 충분히 즐거울 대목은 많다.
“발레리온 왕의 마음은 뻐꾸기(시계) 속에 들어가고, 대신 뻐꾸기는 경찰대장 몸에 들어갔다. 이렇게 정의가 실현되었다. 왕은 그 후 밤낮으로 성실하게 일하면서 의무적으로 뻐꾹뻐꾹 시간을 알려야 했다.…자기 시대의 기념품이 되어 메인 홀의 벽에 매달린 채, 생각 없는 놀이들을 한 죄를 속죄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경찰대장은 업무에 복귀해 흠 없이 일함으로써 그 자리는 뻐꾸기의 정신 상태로도 충분히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다섯 번째 외출 혹은 발레리온 왕의 해로운 장난’ 중에서)
솔라리스는 몇 차례 국내에 소개됐지만 사이버리아드는 처음 번역됐다. 둘 다 초판에 한정해 양장본으로 선보인다. 원제 ‘Cyberiada’(1965년).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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