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셀러 따라잡기]편집위원 5명이 모두 OK할 때까지…

  • 입력 2008년 6월 21일 03시 00분


5년을 싸워 나온 세계문학전집 3권

간만에 고향 친구들과 1박 2일. 잠자리 수다 끝에 ‘성에 눈뜬 계기’가 도마에 올랐다. 백수삼촌 성인잡지 자연발화 옆집누나…, 여러 루트를 공개하다 한 녀석의 낭랑한 음성.

“세계문학전집.”

“응?”

“…중에 채털리 부인의 사랑.”

요즘 세계문학전집이 출판계 이슈다. 대체로 이미 ‘클래식’ 반열에 오른 외국소설을 소개한다. 이 분야는 꽤 오래 민음사 텃밭이었다. 그런데 지난달 영국 펭귄그룹이 웅진과 ‘펭귄클래식’으로 뛰어들었다. 여기에 을유문화사 문학동네 등도 결전을 채비 중이다.

결전이라곤 했지만 그리 심각하진 않다. 오히려 민음사는 반갑다는 눈치. 장은수 대표는 “그만큼 세계문학 장르가 커져 시장이 활성화될 계기”라고 말했다. 뭐, 속이야 어떻든. 독자로선 원전을 다양하게 접할 기회니 손해날 거 없다.

그중 유독 ‘을유 세계문학전집’에 눈길이 간다. 새로운 진출이 아니라 ‘왕의 귀환’인 탓이다. ‘1959년 한국 최초 세계문학전집 이후 50년 만의 부활.’ 흠, 홍보 카피가 살짝 거하긴 하다. 같은 해 비슷한 시기에 정음사도 세계문학전집을 냈고, 을유 전집도 1975년에 100권으로 마무리했으니 정확히는 33년 만이지. 근데 중요한 건 그런 숫자놀음이 아니다.

을유가 세계문학전집을 다시 구상한 건 2003년. 사실 지난해 가을 첫선을 보일 예정이었다. 그런데 밀리고 밀려 이번 주에야 나왔다. 밀린 이유? 여러 사정이 있었지만 새로이 시도한 ‘만장일치’와 ‘교차 점검’ 시스템 때문이란다.

먼저 만장일치제. 세계문학전집 편집위원은 모두 5명. 위원장 신광현(영문학) 서울대 교수를 포함해 각기 다른 언어권 교수들이 포진했다. 그런데 서로 분담하는 게 아니다. 선정부터 번역 마무리까지 모두가 ‘오케이’해야만 책을 낸다.

“끊임없이 토론합니다. 일단 번역자도 그 작품에서 국내 최고라고 다들 납득해야 선정합니다. 번역본이 나와도 끝이 아닙니다. 편집위원 모두에게 제본해 보냅니다. 한 명이라도 고개를 저으면 과감히 재번역하거나 포기했습니다. 당연히 오래 걸리죠.”(신 교수)

교차 점검도 흔한 방식은 아니다. 번역자에게 1차 번역본을 같은 언어권 역자가 원본과 대조함을 미리 약속받았다. 몇몇 번역가는 불같이 화를 냈다. 그래도 원칙을 끝까지 지켰다. 그렇게 나온 작품이 ‘마의 산’ 상·하권과 ‘리어 왕·맥베스’다.

출판사 측은 속도 많이 탔단다. 신 교수는 “단순히 세계문학을 ‘소개’하는 게 아니라 우리 문학으로 체화하는 작업이라 여겼다”며 “번역가가 자기 작품으로 받아들여 우리의 소중한 책을 쓰는 심정으로 만들길 원했다”고 말했다.

정답은 없다. 공들인 만큼 알아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의 산’에 이런 대목이 있다. ‘공간은 인간을 여러 관계로부터 해방시키며, 인간을 원래 그대로의 자유로운 상태로 옮겨 놓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 공간, 세계문학전집이 되길. 그 옛적, 친구를 각성시켰듯이.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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