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그것도 오랜 시간 동안 억압됐던 기억이라면. 1980, 90년대 미국에서는 어린 시절 부모나 친척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고발이 잇따랐다. 많은 여성이 심리치료를 받던 중 성추행당한 기억을 되찾았던 것. 심리치료사들은 받아들이기엔 너무 고통스러운 사건을 겪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그 기억을 억압해 일어나지 않은 일로 간주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억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이 중 대부분이 최면과 암시 등으로 만들어진 거짓 기억이라고 주장했다. 심리학자 마이클 내시는 “결국 우리(임상의들)는 환자가 과거에 관해 믿는 환상과 확실한 과거의 기억을 구분할 수 없다. 정말로 양자 간에 구조적인 차이는 없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심리학자인 저자도 존재하지 않는 인물과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실재하는 것으로 믿도록 하는 실험을 통해 기억이 조작될 수 있는 것임을 입증해 왔다. 또 법정에 전문가로 나가 고발한 사람들과 고발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 책은 거짓 기억을 둘러싼 소송과 논쟁의 한복판에 있었던 저자의 기록이다.
기억이 왜곡과 조작을 거친다면 어린 시절 폭력을 당한 경험은 어떻게 증명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이 책은 대답하지 않는다. CNN을 비롯한 여러 매체가 문제를 제기할 정도로 심리치료와 소송이 유행했던 미국과 한국의 현실은 다르다. 옮긴이도 “미국과 달리 아동 성추행 문제가 제대로 다뤄지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면 실제로 어린 시절 성추행을 당했고 그 기억을 평생 잊은 적 없는 ‘진짜’ 피해자들이 오해받거나 상처받을까” 걱정한다. 원제 ‘The Myth of Repressed Memory(억압된 기억의 신화)’처럼 ‘억압된 기억’이 신화가 되기엔 한국은 억압된 기억을 충분히 불러올리지 않은 것 아닐까.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