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멀리 꿈꾸는 사람들 그들과 손을 잡았다”

  • 입력 2008년 6월 21일 03시 00분


◇체로키 부족/허혜란 지음/280쪽·9800원·실천문학사

‘가식도 없고 수치도 없다. 북소리로 다가서고 문자로만 소통하는 그와 그의 회원들. 그 속에 담긴 것은 본능과 욕망뿐이다. 감각적인 터치가 엄지손가락 밑에서 이루어진다. 돈으로는 살 수 없는, 문자에 대한 중독된 기쁨은 거기서 온다.’(‘북 치는 소년’ 중에서)

화려한 주목. 소설가 허혜란(38) 씨는 그게 낯설었다. 2004년 본보 신춘문예(단편)와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동시 당선. 한동안 소설을 쓸 수가 없었다.

“부담감에 2년쯤 주저앉아 있었어요, 사춘기처럼. 그래도 열꽃 피는 시기가 나쁜 것만은 아니죠.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녔어요. 몸을 움직이니 육체도 마음도 좋아졌어요.”

그의 숨고르기는 다행히 ‘까마득하진’ 않았다. 당선작 ‘독’과 ‘내 아버지는 서울에 계십니다’를 포함한 9편의 단편을 모은 첫 소설집이 17일 출간됐다. 허 씨는 “등단 때보다 지금이 더 기쁘다”면서 “한곳에 머무르기보단 멀리 꿈꾸는 이들의 소통을 다뤘다”고 말했다.

우즈베키스탄은 그런 작가의 심정을 전하는 울림통이었다. 소설 중 무려 4편이 그곳을 배경으로 했다. 1996년부터 2년이나 머물렀던 경험이 크게 작용했을 터. “모슬렘과 러시아문화, 고려인이 뒤섞인 곳이죠. 디아스포라(Diaspora)적 삶의 진원지라고나 할까. 어느 순간 서울의 모습도 중첩됐어요. 안주하지 못하고 떠도는 힘겨운 소통이 보였죠.”

비슷한 소재, 닮은 정서. 하지만 놀랍게도 소설은 모두 다른 색깔을 낸다. 길지 않은 문장을 구사하면서도 속도를 자유로이 늘였다 줄였다. 같은 곡을 다르게 해석하는 변주곡마냥. 그 속엔, 세상을 떠도는 아련함이 진득하다. ‘내가 더 가까이 가겠다, 나를 택하여라, 내가 너를 사랑하겠다.’(‘아냐’ 중에서)

소설의 부유는 작가의 일상과도 빼닮았다. 허 씨는 지금도 시간만 나면 여행길에 오른다. 열 살배기 아들은 소중한 여행 동료. 초등학교도 관두고 ‘홈 스쿨링’으로 공부한다. 허 씨는 “학교라는 틀에 갇히기보단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걸 배우도록 돕고 싶다”면서 “함께 여행을 다니다 보면 아이 덕분에 깨치거나 배우는 게 무척 많다”고 말했다.

‘인디언들이 말이야. 언젠가 아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말을 타고 달리다가도 되돌아보고, 가다가 멈춰 서곤 했대. 왜 그러느냐고 건성으로 묻는 그에게 아내는 말했다. 빨리 달리면 영혼이 못 쫓아올까 봐서. 그리고 아내는 덧붙였다. 참 바보 같지? 그때 그는 뭐라고 했더라.’(‘체로키 부족’ 중에서)

“정착하지 않는 어려움도 있죠. 하지만 이런 삶이 더 잘 맞는 거 같아요. 일단…, 즐겁거든요. 시끌벅적하고 열악한 여행길이, 글도 더 잘 써져요. 조만간 종교나 민족, 문화가 서로 다른 이들이 만나는 사랑을 다룬 장편을 쓸 겁니다. 물론 중앙아시아를 배경으로.”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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