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에게 사랑하는 여인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육사에게 있어서 여성을 향한 사랑과 이념을 좇는 사랑은 함께할 수 없는 서로 다른 길이었다는 것이다. 이육사의 ‘손님’(‘청포도’)은 한용운의 ‘님’과 달리 연애시의 감성과 잘 겹쳐지지 않는다.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오는 손님”(‘청포도’), “다시 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광야’)은 이육사가 열렬히 희구한 이념적 비전이자 민족의 미래 얼굴이다.
그 이념을, 그 미래를 오로지 사랑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 ‘절정’에는 이념의 푯대로 자신의 몸을 꼿꼿이 세운 이의 열렬한 고독 같은 것이 깔려 있다. 신석초는 이 시에서 “일제에 쫓기는 혁명가의 어쩔 수 없는 위기” 지점을 읽지만, 이 절정의 시공은 쫓기는 혁명가가 내몰린 마지막 장소라기보다는 혁명가가 선택한 지향점을 가장 날카롭게 가리키고 있는 화살표의 끝 같은 곳이다. 그러므로 한 발도 더는 허락하지 않는 이 절정에서 눈 감고 생각해 볼 때 ‘강철로 된 무지개’는 떠오르는 것이다. 가장 찬 계절, 가장 차가운 땅에서 혁명적 로맨티시즘이 획득한 절정의 이미지로 ‘강철로 된 무지개’는 저쪽에서 이쪽까지 걸려 있다.
김행숙 시인·강남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