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문학, 한국고전문학, 아랍문학, 스페인문학, 동아시아역사학 전공자 등 관련이 적어 보이는 6명의 학자가 모여 최근 책을 냈다. ‘중세 동·서 문화의 만남’(단국대출판부). 이들의 머리를 맞대게 한 연구 주제는 책 제목에서 드러나듯 고대∼근세의 동서 문명 교류다.
단국대 아시아아메리카문제연구소의 고혜선(중남미문학) 소장, 김명준(한국고전문학) 객원연구원, 임병필(아랍문학) 윤선미 (스페인문학) 연구원, 단국대 동양학연구소의 김철웅(동아시아역사학) 연구원 등 6명이 28일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를 보기 위해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을 찾았다. 동서 교류의 핵심이었던 페르시아의 유물을 통해 동서 교류의 양상을 좀 더 입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의 연구가 시작된 것은 2004년. 고 소장은 9∼13세기 도무지 만난 적 없을 것 같은 한반도(고려)와 이베리아반도(안달루시아) 시가(詩歌)의 형식, 주제가 유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곤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관련 분야 전문가들을 수소문해 공동 연구를 제안한 뒤 연구팀을 꾸렸다.
“고려가요는 여성을 화자로 해 애절한 사랑과 이별을 노래했습니다. 고려만의 독특한 주제와 형식이었죠.”(김명준 객원연구원)
“비슷한 시기 아랍의 지배를 받은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에서도 새로운 시가가 출현했어요. 연이 나뉘고 후렴이 반복되는 형식의 애절한 서정시라는 점이 고려가요와 유사했죠.”(윤선미 연구원)
유사함의 뿌리는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시가였다.
“송나라에서 유행한 시가 사(詞)도 주제와 형식이 고려가요, 안달루시아 시가와 비슷합니다. 중앙아시아의 시가가 실크로드를 통해 동서양의 양극단으로 퍼져간 것이죠.”(김철웅 연구원)
이들의 연구는 2005년 학술진흥재단의 기초학문연구 지원 대상으로 선정됐지만 2006년 지원이 중단됐다. 고려가요는 자생적 민요라고 하는 국문학계가 외래에서 전래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열정은 꺾이지 않았다. 자비로 연구를 계속해 고려가요,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시가, 안달루시아 시가의 유사성을 실증적으로 밝혀냈다.
임병필 연구원은 “고려가 이미 세계 문명 교류의 글로벌리제이션 속에 있었음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문명교류 개론서 형식으로 이 책을 출간한 것이다.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 전시작 ‘가젤 신화 무늬 잔’에도 단초가 숨어 있습니다. 페르시아의 시 ‘가잘’은 사슴의 배를 가를 때 우는 소리를 형상화한 애절한 사랑 노래입니다. 고려가요 청산별곡에 ‘사사미 짐ㅅ대예 올아셔 해금(奚琴)을 혀거를’이라는 구절을 사슴이 아픈 소리를 내는 것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면…. 페르시아와 고려 사이가 그리 멀게만 느껴지지 않죠?”(고혜선 소장)
정복지 문화를 존중한 페르시아 문명을 통해 ‘문화는 섞일수록 창조적’이라는 교훈을 얻게 된다고 말하는 이들. 9월엔 고려가요와 안달루시아 시가의 유사성을 밝혀낸 연구 성과를 담은 본격 학술서를 출간할 계획이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