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활자의 추억을 찍어냅니다”

  • 입력 2008년 6월 30일 02시 57분


■ 국내 유일 활자인쇄소 파주 출판도시 ‘활판공방’

“금속활자 종주국 전통 계승하자”

전국 돌며 낡은 기계-기술자 모아

“요철감 느껴지는 책장 넘겨가면

시골길 걷는듯한 향수에 빠지죠”

어른 키를 훌쩍 넘는 목재 선반에 자족(字族)별로 깨알같이 박힌 은색 납 활자들.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한 자모(字母) 저장대 옆에서 주조공(鑄造工) 정흥택(67) 씨가 고온에 녹은 납으로 따끈한 새 활자를 굽고 있었다. 문선공(文選工) 김표영(74) 씨가 활자 선반을 오가며 분주히 채자(採字·활자를 고르는 작업)를 하는 동안 조판(組版)을 걸어둔 활판 인쇄기에선 비릿한 윤활유와 잉크 냄새가 코끝을 훅 찔렀다.

1980년대 초 디지털 인쇄가 등장한 이래 하나둘 사라져 간 납 활자 인쇄. ‘아직도 이런 곳이…’ 하는 생각과 함께, 마치 1960, 70년대 조판 현장으로 시간여행을 온 듯했다.

27일 경기 파주시 출판도시 내 ‘활판공방’(시월출판사 운영). 지난해 11월 문을 연 이곳은 납 활자 인쇄 공정으로 책을 찍어내는 국내 유일의 인쇄공장이다.

현재의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활자문화 지킴이’들의 오랜 노력이 필요했다. 박건한(66) 활판공방 편집주간, 정병규(62) 정디자인 대표, 박한수(40) 시월출판사 대표 등이 그들. 이들은 “금속활자 종주국의 전통을 계승하자는 사명감, 사라진 활자들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으로 납 활자 문화의 복원을 결심하게 됐다”고 말했다.

흑백사진에서나 볼 수 있는 활판 인쇄기와 교정기, 사진 식자기 등을 구비하기 위해 박 대표는 10여 년간 전국을 누볐다.

“재소자들에게 인쇄술을 가르쳤단 말을 듣고 안양과 제주 교도소 등을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초 전량 폐기처분됐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 수소문 끝에 전북 완주군 삼례읍에서 국판 4절(신문 절반 정도 크기) 활판인쇄기를 구하고 서울 중구 만리동에서 수동 주조기를 구했습니다. 평생을 다룬 기계를 제게 넘겨주면서 막걸리 한 잔으로 고사를 지내던 인쇄공들을 볼 땐 마음이 뻐근해지기도 했죠.”

공방장을 맡고 있는 정 씨의 감회도 남달랐다.

“15년 만에 이런 기계를 만지니 어색하기도 하지만 시대가 변했는데도 이런 인쇄 시스템이 계승되고 있다니, 자부심을 느낍니다.”

이곳엔 정 씨를 비롯해 ‘한때 납 활자가 사라지리라곤 상상도 못했던’ 연로한 숙련공 3명이 함께 일하고 있다.

공방 한편엔 조판을 끝낸 수백 개의 활자판이 차곡차곡 포개져 있었다. 정 씨는 “채자한 활자로 식자공이 조판을 하면 그것을 인쇄기에 걸고 압력을 가해 인쇄를 한다”고 설명했다.

납 활자 인쇄는 사실 자모 조각(아연판에 글자모양을 새기는 것)에서부터 인쇄, 해판(解版·인쇄가 끝난 후 활자와 공목을 분리하는 작업)에 이르기까지 복잡하고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지만 이들은 활자본만의 아날로그적 감성에 푹 빠져 산다.

박 주간은 “오프셋 인쇄(간접인쇄)가 아스팔트 길 같다면 활자 인쇄는 마치 시골의 우둘투둘한 자갈길처럼 요철감이 느껴진다”면서 “책장을 넘길 때의 그 촉감이야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활자본의 매력”이라고 전했다.

활판공방은 활자본의 이 모든 매력을 살려 7월 초 첫 시집을 출간한다. 현대시 100주년을 맞아 이근배 김종해 시인 등 시인협회 회장을 지낸 원로 시인 5명의 시집을 내는 것. 각 1000부 한정판으로 제작되는 이 시집은 출판부터 제본까지 모두 수작업으로 이뤄지고 직접 쓴 일련번호도 붙는다. 종이는 수명 500년 이상의 전통 한지를 사용할 계획이다.

그러나 활자 인쇄의 미래가 밝기만 한 것은 아니다. 현재 활판공방의 기술자 3명 가운데 최연소가 67세. 이들을 이어갈 젊은이들이 없어 언제 맥이 끊길지 위태로운 상황이다. 기계 고장이 잦고 자모가 부족하지만 이를 생산하는 곳이 없는 것도 문제다. 그래도 사라지는 활자 문화에 대한 이들의 열정은 뜨거웠다.

“책을 만드는 사람의 ‘장인 정신’까지 담겨 나오는 것이 진정한 ‘명품’이 아닐까요. 활자의 맛을 느낄 수 있는 활판본은 ‘손의 회복’입니다. 그건 하이테크(high tech)에서 하이터치(high touch)로의 진화입니다. 공방 내에 활자본 시집도 전시하고 조판 체험 프로그램도 만들어 아날로그 인쇄의 아름다움을 계속 전파할 겁니다.”

파주=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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