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가 하늘을 유유히 나는가 하면 우주 로켓 옆으로 고래가 헤엄친다. 느릿느릿 기어가는 무지갯빛 달팽이와 폴짝폴짝 뛰는 왕눈이 개구리가 사이좋게 공존한다.
제주 서귀포시 동홍동 평생학습센터를 지나는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진다. 길이 200m의 밋밋한 담장이 한 달 전 산뜻한 옷을 입었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상상의 세계와 원색의 활달한 그림이 시선을 사로잡는 벽화의 작가는 17명의 어린이. 이 센터의 ‘엄마와 함께하는 미술강좌’에서 그림을 배우는 유아와 초등학생들이다.
#제주와 더불어, 어린이들과 함께
이들의 미술 선생님은 바로 이왈종(63) 화백이다. 1990년 교수직을 버리고 서울에서 아무 연고도 없는 제주도로 내려와 작업해 온 그는 미술시장에서 알아주는 인기 화가. 그런 그가 이곳에서 5년째 꼬박꼬박 매주 월요일과 화요일 어린이들을 가르친다. 이전의 다른 강좌까지 합치면 남들이 알아주든 말든, 어떤 보수도 기대하지 않고 해온 일이 어느덧 10년을 헤아린다.
제주의 자연이 자신의 삶과 미술을 풍요롭게 한 만큼 뭔가 되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고, 어려서부터 미술에 대한 관심을 심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시작한 일인데 “내가 가르치는 것보다 아이들에게 배우는 것이 더 많다”고 그는 힘주어 말한다.
“솔직히 나보다 아이들 그림이 더 좋다. 형식과 양식을 무시하고 거침없이 그려내는 상상력에 내가 한 수 배운다.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마음도 맑아진다.”
어찌나 열성인지 3년 전 서울에서 개인전을 여는 도중에도 수업을 이유로 바로 돌아왔다. ‘그림 재주가 아니라 창의력과 상상력을 키워주는 수업’이란 입소문이 나면서 강좌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다. 수강신청 전날 밤부터 줄이 늘어선다.
“그림만 잘 그려선 소용없다. 인성교육이 중요하다. 수업 시작 전에 인사부터 가르치고 3번 결석하면 자동으로 아웃이다.”
그는 어머니의 역할도 강조했다. “이래라저래라 간섭하지 마라. 자유롭게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절대 그림에 손대지 마라. 엄마 눈에 아무리 엉뚱하게 보여도 격려하고 칭찬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그림이 달라진다.”
#45세의 선택, 끝없는 도전
서귀포시 정방폭포 앞 작업실에선 회화뿐 아니라 엄청난 공력과 기술이 필요한 종이 부조와 나무 조각, 도자 작업이 동시에 이뤄진다. 10월 개인전을 앞두고 있다. 아이들 가르치는 시간 말고는 사람도 거의 만나지 않고 작품에만 몰두하는 단조로운 생활이다. 오전 2, 3시라도 잠에서 깨면 작업을 시작한다. 사람들은 그림만 그려도 잘살 수 있는데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그를 의아하게 바라본다.
“미술이란 항상 신선하고 새로워야 한다. 잘 팔린다고 똑같은 작업만 되풀이하거나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작품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 화가라서 그림이 편하지만 고통이 따르더라도 실험적인 것, 안 팔리는 작업도 시도해야 한다. 내 생각은 그렇다.”
‘생활 속에서’ ‘생활의 중도’ ‘서귀포 생활의 중도’로 이어지는 그의 작업에서는 현실과 초현실이 조화를 이루고, 작은 미물도 인간과 평등한 존재로 인정받는다. 달개비 꽃이 살림집을 내려다보고, 돌하르방과 물고기는 산과 바다를 떠다닌다. 자연과 사람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세상. “주체와 객체도 없고 크고 작은 분별도 없는 절대 자유의 세계를 추구한다”고 그는 말한다.
전업 작가로서의 삶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그는 안정된 교수직을 버렸다. 작업에만 미치도록 몰두하고 싶었다. “밥만 먹으면 되는 거다.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는 게 좋은 거다”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때 마흔다섯 살이었다. 18년이 흐른 오늘, 그는 어떤 생각으로 작업을 하고 있을까.
“진짜 하늘이 내린 화가는 한 세기에 한두 명 나올까 말까다. 난 생활인이다. 내 앞에서 예술을 논하지 마라. 난 재주가 없다. 먹고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민화가 좋다. 영향도 많이 받았다. 예술가라는 자의식 없이도 그들은 좋은 그림을 그렸다. 예술가라는 정신을 버리고 장인이란 생각으로 작업한다. 그게 더 치열하거든….”
서귀포=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