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는 맛’이 부족해…‘선배 타짜’가 본 도박영화 ‘21’

  • 입력 2008년 7월 1일 02시 58분


‘21’은 도박영화의 형식을 빌린 성장영화다.

도박영화의 백미는 ‘쪼는 맛’. 목숨(‘지존무상’·1989년) 또는 손목(‘타짜’·2006년)을 걸고 벌이는 한판이 성패를 좌우한다. 이야기에 삽입되는 모든 요소는 마지막 카드를 뒤집기 전의 클라이맥스를 위한 것이다. 하지만 ‘21’에는 건곤일척 한판이 없다.

원작소설 ‘MIT 수학 천재들의 카지노 무너뜨리기(Bringing Down the House)’는 1990년대 활동했던 대학생 도박단에 대한 이야기. 로버트 루케틱 감독은 카드 숫자의 합이 21이 되게 만드는 블랙잭 이야기를 21세 풋내기의 성장담으로 바꿨다. 데뷔작인 로맨틱 코미디 ‘금발이 너무해’(2001년)처럼 시끌벅적 호화판 파티 장면에 심혈을 기울여 도박판의 긴장감은 찾아보기 어렵다.

주연을 맡은 짐 스터게스(벤)는 어땠을까. 한때 날렸던 스크린의 ‘타짜’들과 그를 비교했다.

① ‘레인맨’(1988년)의 레이먼드(더스틴 호프먼)

‘21’에서 벤이 구사한 전략은 ‘카드 헤아리기’.

블랙잭의 기본 룰은 단순하다. 두 장 이상의 카드를 차례로 받아 숫자 합이 21이 되면 딜러를 이긴다. 합이 21보다 커지면 무조건 진다. 21이 나오지 않은 채 멈췄을 때는 합이 높은 쪽이 승자다.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미키 로사 교수(케빈 스페이시)는 벤 등 수재들에게 테이블 위에 공개된 카드의 숫자를 합산하게 했다. 이미 나온 카드를 따져 앞으로 나올 카드를 예측하는 방법.

딜러의 손동작과 벤의 눈 움직임을 교차시킨 짤막짤막한 편집은 카드 헤아리기의 긴장감을 높이려 한 전략인 듯하다. 하지만 레인맨의 자폐증 환자 레이먼드가 카드 6벌(312장)을 통째로 기억해 무표정한 얼굴로 차분히 거금을 따내는 장면의 박진감에 미치지 못한다.

② ‘라운더스’(1998년)의 마이크(맷 데이먼)

얌전한 공대생 벤은 도박판 물이 들면서 고급 양복을 걸치고 밤의 환락에 빠져든다. ‘라운더스’의 까칠한 뉴욕 법대생 마이크라면 콧방귀를 뀔 처신이다.

마이크의 주 종목은 ‘텍사스 홀덤(Texas Hold'em)’. 다걸기 중독성으로 유명한 게임이다. 그의 주무대는 번지르르한 라스베이거스가 아닌 어두침침하고 담배 연기 자욱한 지하 도박장. 태생이 다르다.

클라이맥스 결판에서 마이크가 상대하는 적수는 러시아 마피아 ‘테디 KGB’다. 클로즈업 교차편집으로 충돌하는 45세 전성기 존 말코비치와 20대 맷 데이먼의 패기가 볼만하다.

승리한 마이크는 본전만 챙기고 큰물 라스베이거스로 떠난다. 배짱은 넘치고 욕심은 없다. 잔꾀로 겨우 목숨만 건지고는 “MIT에서 제일 예쁜 여자친구를 얻었다”고 뻐긴 팔불출 벤. 반성해야 한다.

③ ‘타짜’의 고니(조승우)

고니는 레이먼드나 마이크 같은 천재가 아니다. 벤처럼 카드 숫자를 암산할 능력도 없다. 고니에게 본받을 점은 ‘도박을 끊었다’는 것.

‘21’에서 벤은 하버드대 의대 등록금 30만 달러(약 3억 원)를 마련하려고 도박판에 뛰어든다. “목표액을 채우면 그만두겠다”고 다짐하는 순진한 벤에게 로사 교수는 “그렇게 하라”고 능글맞게 대꾸한다.

‘타짜’ 원작 만화에서 고니가 도박을 끊기까지 겪은 고난과 희생을 안다면 그런 말 쉽게 못한다. 여러 차례 칼에 찔리고, 기차에서 떨어지고, 친구와 스승을 잃고. 이런 지경이 되고도 끊기 어려운 게 도박이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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