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꼬박 나흘 동안 마드리드 이곳저곳을 헤맸지만 출국 날까지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허탈한 마음에 지하철을 타고 가다 무작정 사람들이 많이 내리는 역에서 내려 허름한 음반 가게에 들어갔다.
가게 구석에서 오래된 신문뭉치를 발견한 그는 비행기 시간도 잊고 신문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로스 카나리오스에 대한 신문기사 3개를 찾아냈다.
“밴드에 대한 신문기사 몇 개를 찾아낸 것이 뭐 그리 대수냐고요? 그건 수집의 기쁨을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당시 아트록에 심취해 있던 저는 음반이든, 신문기사든 관련된 것은 모두 모으고 싶었습니다.”
○ “원하는 것을 모으는 것이 수집 정신”
성 씨 같은 이는 전문 수집가다. 취미로 물건을 모으는 아마추어 수집가와는 달리 전문 수집가는 수집을 ‘업(業)’으로 여긴다.
이들에게 수집은 수집물뿐 아니라 수집 행위만으로도 중대한 의미가 있다. 단순히 모으는 것이 아니라 수집 행위, 수집물을 자신만의 이야기로 재구성하는 것이 진정한 수집이라는 것이다. 수집의 고수들은 테마와 장르를 설정해서 이에 맞춰 수집한다.
그래서 대다수 전문 수집가에게 수집품의 개수와 규모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성 씨는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음반을 몇 장 모았느냐’는 것인데 솔직히 나도 잘 모른다”고 말했다.
“1000장의 가치가 100만 장보다 더 클 수 있죠.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모았느냐’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바로 그 물건’을 소장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 씨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40여 년간 희귀 음반을 모아왔다. 1982∼1999년 라디오 DJ로 활동했고 지금도 ‘시완레코드’라는 음반유통회사를 운영하며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이달 말까지 서울 종로구 통의동 대림미술관에서 음반수집 전시회 ‘성시완 컬렉션 40/32/20’을 연다.
○ 수집 과정의 ‘고통’도 재미
전문 수집가들은 “수집의 재미는 ‘고통’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포크음악 음반과 ‘피겨(플라스틱 인형)’를 집중 수집하는 이승(46·음반판매업) 씨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들이는 수고는 수고가 아니다”고 말한다.
그는 1995년 음반 수집차 독일에 갔다가 길거리에서 정신을 잃은 적도 있다. 당시 유럽은 이상고온으로 ‘20년 만에 가장 더운 여름’이 닥쳤지만 몸을 사리지 않고 음반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일사병으로 쓰러졌다는 것.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호텔로 다시 돌아왔지만 찬물로 샤워를 한 후 정신이 들자 다시 음반을 찾으러 나섰다. 그렇게 찾던 음반 한 장을 구해가지고 돌아오면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는 99장 한정 발매된 전 세계 포크록 음반 타이틀 500개와 음반 2만8000여 장을 소장하고 있다.
“빠듯한 일정에 어디서 찾을 수 있다는 확실한 보장도 없이 외국에서 수집품을 찾아다니다 보면 당연히 무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군대에서 훈련받을 때보다 더 힘들다니까요(웃음). 귀국할 때가 되면 온몸이 성한 곳이 없습니다. 그래도 원하는 것을 찾았을 때의 기쁨은 어디에도 비할 수 없습니다.”
○ 과거 회상하며 현재의 발자취 기록
수집은 기억을 떠올리고 현재의 발자취를 기록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수집품 자체가 중요하기도 하지만 수집의 배경과 맥락을 뒤돌아보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재미도 크다.
미술작가 Sasa[44](36) 씨는 어린 시절 즐겨 보던 잡지 ‘보물섬’을 모으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애써 모아놓았던 보물섬 수백 권을 스무 살 때 어머니가 한꺼번에 처분해 버려 다시 모으는 중이다.
“열 살 때 보물섬 창간호를 사려고 서울 서초구 반포동 집에서 광진구 출판사까지 혼자 버스를 타고 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늦게 집에 돌아와 어머니한테 혼나기는 했지만 보물섬이 생겨서 기쁘기만 했습니다. 지금도 보물섬을 구하려고 헌책방에 열심히 들르고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도 들어가 보지만 많이 모으지 못했어요. 워낙 구하기 힘들어서요.”
김현지 기자 nuk@donga.com
“정보공유는 기본… 발품을 팔아라”
■ 수집가들이 말하는 수집 요령
수집의 첫 단계는 자신이 원하는 수집 분야와 주제를 정하는 것이다.
수집 비용의 장벽은 많이 낮아지는 추세다. 비용이 많이 들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미술품 수집에도 수만∼수십만 원대의 거래가 활발하다.
지상현 대림미술관 수석큐레이터는 “상당수 수집가는 부담 없이 저렴한 작품에서 시작해 점점 안목을 높여간다”고 말했다.
수집의 고수들은 수집품을 돈 주고 사지 않는 경우가 많다. 수집 방식은 오히려 물물교환에 가깝다. 수집가들은 거래금액의 10% 정도만 현금으로 오가고 나머지 90%는 물물교환하는 식으로 거래한다.
이런 식으로 수집을 하려면 우선 자신이 충분한 양의 수집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또 자신만큼 풍부한 수집품을 가진 사람이나 거래처를 알고 있어야 한다. 이 때문에 수집의 깊이가 깊을수록 물물교환을 할 수 있는 거래의 폭이 넓어진다. ‘선수들끼리의 장(場)’은 따로 있는 셈이다.
이런 ‘장’의 특징은 ‘아무나 못 들어간다’는 것. 서로의 ‘내공’을 확인해야만 거래가 시작된다. 섣불리 ‘장’이 커졌다가 물건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라갈 수도 있다.
그렇지만 초보 수집가라고 겁먹을 필요는 없다.
일단 수집의 주제를 정하면 어디에서 수집품을 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보는 찾기가 어렵지 않다.
음반 분야는 ‘이베이’(www.ebay.com) ‘팝사이크닷컴’(www.popsike.com) 등에 수집 정보가 실려 있다. 피겨(플라스틱 인형) 수집에 관심이 있다면 ‘아이피규어’(www.ifigure.co.kr) 등의 커뮤니티 사이트에 관련 정보와 사진이 많이 실려 있다.
수집가들은 “어디에서 어떤 물건을 수집하고 교환하는지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면 귀가 열리게 된다”며 “수집의 즐거움은 서로 비슷한 관심사를 공유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발견하는 것으로 완성된다”고 말한다.
김현지 기자 nu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