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통과해 가야 하는 저 엄청난 고독들 속에는 어떤 각별히 중요한 장소들과 순간들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어떤 낯선 도시를 앞에 두고 깜짝 놀랄 때 우리가 바라보게 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다.”》
여행길 풍경 음미하는 법을 배우다
아름다운 책 한 권이 왔다. 장 그르니에(1898∼1971)의 ‘섬’. 첫 장,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순간이 있다’는 사려 깊은 첫 문장에 가슴이 내려앉는다. 이것은 시작이다. 이 책은 되풀이해 읽을수록 향기가 나는 문장들로 엮여 있다.
‘섬’이 세상에 처음 선보인 것은 1933년,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것은 1980년이다. 느지막이 소개됐지만 영향은 컸다. 철학적인 사유로 가득한 이 에세이는 프랑스 산문을 대중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알베르 카뮈의 스승으로 유명한 저자 그르니에는 알제대 철학교수로 철학서와 에세이집 등 저서 30여 권을 남겼다. 그중 한 권인 ‘섬’은 남프랑스 지중해에 떠 있는 섬들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떠오른 상념들을 시적인 문장에 담은 작품이다.
‘철학’이 ‘여행’과 어울릴까? 이런 의문이 생기는 독자들도 있을 터. 책을 읽다 보면 왜 ‘섬’이 여행가에게 특별하게 꼽혔는지 헤아려진다. 그르니에의 깊은 사색의 출발은 우리가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가령 투명한 하늘로부터 ‘무심(無心)’의 매혹을, 튀니지의 작은 해변 도시의 꽃 핀 테라스에서 아름다움이 주는 공허함을 읽는다.
‘물루’라는 이름의 고양이 한 마리에게서 촉발한 생각의 깊이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세계가 저 혼자서 끝없이 벌이는 싸움에 끼어들면서도 그는 제 행동의 동기가 한갓 환상일 뿐임을 깨달으려 하지 않는다. 놀이를 하되 놀고 있는 제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볼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 그를 바라보는 것은 나다. 조그만 빈틈도 없이 정확하게 몸을 놀려 제가 맡은 역할을 다하고 있는 그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황홀해진다.’ 고양이를 바라보는 시선의 날카로운 긴장감에 온몸이 쭈뼛한다. 과연, 평범한 것들로부터 이렇게 풍요로운 사색을 끌어낼 수 있는 건 여행이라는 여유의 시간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자신의 존재를 단단히 붙들어 매어주는 책으로 항상 ‘섬’과 함께 걷고 있는 느낌이라며 이 책을 추천한 이병률 시인. 지상 곳곳을 여행해 온 그는 “이 한 권의 책을 맛있게 읽기에 내 여행의 길이는 항상 짧았다”고 겸허하게 말하면서도 “이 책을 통해 굉장한 풍경을 이해하는 법과 아름다운 여행을 기억하는 법들을 배웠다”고 고백한다.
뛰어난 서문으로 인해 더욱 유명한 책이다. 제자 카뮈가 이 책에 대해서 이와 같은 문학적인 문장으로 찬사를 보냈다.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 가슴 뛰는 카뮈의 추천사도 그렇거니와, 에세이를 번역한 김화영 고려대 명예교수가 이 작품에 부치는 탄식은 ‘섬’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일깨운다. “전혀 결이 다른 언어로 쓰인 말만이 아니라 그 말들이 더욱 감동적으로 만드는 침묵을 어떻게 옮기면 좋단 말인가?”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