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길, 배낭 속 친구가 되어주는 책 30선]<12>아메리칸 버티고

  • 입력 2008년 7월 8일 02시 57분


◇아메리칸 버티고/베르나르 앙리 레비 지음/황금부엉이

《“길이 있어 사람들이 다니는 것일까, 아니면 사람들이 다녀서 길이 만들어지는 것일까. ‘율리시즈’에서 레오폴드 블룸은 디덜러스에게 그렇게 물었다. 어떻든 이 책은 길이 만들었다. 미국의 초상이라는 불가능한 작업을 해나가는 방법이 되어준 것은 바로 길이었다.”》

‘미국의 실체’ 찾아 300일간의 대장정

“길이 있어 사람들이 다니는 것일까, 아니면 사람들이 다녀서 길이 만들어지는 것일까. ‘율리시즈’에서 레오폴드 블룸은 디덜러스에게 그렇게 물었다. 어떻든 이 책은 길이 만들었다. 미국의 초상이라는 불가능한 작업을 해나가는 방법이 되어준 것은 바로 길이었다.”

그의 미국 여행은 처음부터 오묘했다.

철학자이면서 저널리스트, 소설가와 영화감독을 넘나드는 ‘프랑스의 악동’. 좌파와 우파, 서구 제국주의와 제3세계 독재를 모두 비난하는 ‘신철학’의 기수인 저자에게 미국 시사지 ‘애틀랜틱’은 왜 미국 기행 르포를 제시했을까. 자국 체제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 혹은 어디선가 균열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미국을 진심으로 걱정해서? 저자가 내린 결론은 ‘둘 다’였다.

“자신의 위기와 운명에 대해 이토록 근심스럽게 파고드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이토록 자신의 정체성에 ‘현기증’(버티고·Vertigo)을 느끼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 미국의 철학적 정치적 유산 속에는 이 도전들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모든 소재가 존재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일단 그의 여행 테마는 ‘토크빌을 따라서’였다. 저서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미국은 서구 미래를 지배할 운명”이라고 말했던 19세기 프랑스 정치사상가 알렉시스 드 토크빌. 그의 탄생 200주년을 맞은 2005년, 저자는 1831년경 그가 미국 교도소를 시찰했던 길을 쫓는다. 토크빌의 예찬대로 미국은 여전히 서구 미래를 지배할 운명인가. 2004년부터 300여 일간 미 대륙 40여 개 도시를 돌아보며 얻은 대답이 책에 담겨 있다.

저자가 보기에 아메리카는 ‘실체가 없는, 본질 혹은 고정된 존재가 없는 나라’였다. 미 제국주의의 흉포한 무기라기엔 순진한 열정으로 가득 찬 사관생도와 유대인을 싫어하면서도 그들의 경제시스템을 차용하는 아랍계 미국인, 국경에서 같은 히스패닉계에게 총을 겨누는 수비대원…. 허상을 좇으면서도 정신은 올곧은. 이긴다고 특별한 보상도 없는 게임에 몰두한 역설적 모습이 허다했다.

미국을 이끄는 지도층 또한 마찬가지였다. 저자는 새뮤얼 헌팅턴 교수에게서 거침없는 인종주의에 대한 무감각을, 혼혈로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된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에게서는 미래 정치의 희망을 읽는다. 이 모든 것이 공존하는 사회. 미국은 영광과 경계의 신호가 동시에 울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이 절망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혼란과 역기능과 불안정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묘하게도 내부의 문명 전쟁이나 분리의 위험이 사람들이 말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 그것은 바로 미국이, 토머스 페인이 미국 민족주의 핵심으로 본 그 ‘항구적인 인내’의 원칙을 지금도 계속 충실히 따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여행작가 김남희 씨는 이 책을 “사고의 깊이나 해석의 광활함, 상상력의 무한성, 그것들을 조립하고 구성하고 해체하는 언어의 경이로운 연금술”이라 칭송했다. 물론 유대인이란 태생적 한계가 드문드문 드러나기도 하지만, 김 씨 표현대로 어느 여행서가 이렇듯 “주변부를 기웃거림으로써 중심을 들여다보고, 사소한 것을 통해 핵심에 도달하는 힘”을 지녔을까. 금세기 최고의 여행서 가운데 하나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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