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개봉한 ‘핸콕’은 슈퍼히어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비극적 로맨스 영화다. ‘슈퍼맨’이나 ‘아이언맨’ 등 만화를 원작으로 한 슈퍼히어로 영화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슈퍼맨과 비슷한 초능력을 가진 3000세의 술주정꾼 노숙자 핸콕(윌 스미스). 누구나 부러워할 힘이 있지만 만사가 귀찮고 삶이 무의미하다. 범죄자를 잡는다고 나섰다가 도로와 빌딩을 때려 부수고, 철로에 갇힌 사람을 구한다며 기차를 탈선시킨다. LA 경찰은 과잉 폭력을 행사하는 골치 아픈 슈퍼히어로를 체포하기로 결정한다.
핸콕의 이런 전횡은 까칠한 성격 탓이 아니다. 텅 빈 집처럼 텅 빈 마음 때문이다. 영화 전반부의 핸콕은 슈퍼히어로의 껍데기만 남은,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은 사람이다. 멀쩡한 이 남자가 술에 찌들고 동공의 초점을 잃는 이유는 십중팔구 한 가지, 사랑을 잃은 아픔이다.
핸콕은 슈퍼히어로를 소재로 사랑과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독특하게 변주한 영화인 셈이다.
○기억이 사라져도 마음은 남는다
늙지 않는 슈퍼히어로 핸콕에게는 80년 전 병원 응급실에서 의식을 되찾기 이전의 기억이 없다.
머리를 다친 채 병원에 실려 왔을 때 손에 꼭 쥐고 있었다는 낡은 영화 표 두 장. 그때 핸콕은 애인과 극장에 가다가 악당의 습격을 받아 머리를 다치는 바람에 기억을 잃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표를 꺼내볼 때마다 마음이 저민다. 핸콕의 얼굴에서 웃음을 몰아내는 것은 원인 모를 아픔과 허망함이다. 이 때문에 그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괴팍한 행동을 일삼는다.
이 같은 헛헛함은 수많은 로맨스 영화가 말해온 ‘기억과 사랑의 관계’에 닿아 있다. 기억이 없어진 뒤 남는 사랑의 아픔을 보여준 미셸 공드리 감독의 ‘이터널 선샤인’(2004년)은 핸콕의 상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영화다.
공드리는 이터널 선샤인에서 특정 기간(옛 연인과 함께한 시간)의 기억을 대뇌피질에서 지워주는 의료 서비스를 설정했다. 그렇지만 기억 속 자아는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영화평론가 정지욱 씨는 “사람은 머릿속 기억이 없어져도 몸에 밴 버릇이라는 흔적 때문에 옛 자취를 되짚게 되는 것 같다”며 “핸콕의 번민은 다른 기억의 흔적으로부터 완전히 떼어낼 수 있는 고립된 기억이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별을 딛고 슈퍼히어로로
핸콕과 80년 만에 다시 만난 아내 메리(샬리즈 시어런)는 “운명 따위는 없다”며 “삶의 모든 것은 선택일 뿐”이라고 냉랭하게 이야기한다.
핸콕은 “기억을 잃고 쓰러진 나를 버리는 것이 당신의 선택이었느냐”고 묻는다. 메리의 답은 단호하다. “기억을 못하면, 그리워하지 못하니까.”
메리는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한 상태. 이런 메리를 핸콕은 미련없이 보내준다. 이 과정에서 마음을 정리한 핸콕은 제대로 된 슈퍼히어로로 거듭난다.
핸콕의 선택은 알츠하이머병을 소재로 한 영화 ‘어웨이 프롬 허’(2006년)에서 남편 그랜트(고든 핀센트)가 내리는 결정과 닮았다. 자신에 대한 기억을 잃어가면서 요양원에서 만난 새로운 사랑에 가슴을 떠는 아내 피오나(줄리 크리스티). 그랜트는 아내와의 45년 사랑을 마무리하면서 아내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그 남자 곁으로 떠나보낸다.
뉴욕타임스의 평대로 핸콕은 “할리우드 슈퍼히어로 계보에 어긋나는 독특한 요소를 추가”했다. 영화평론가 심영섭 씨는 “사랑의 상실이라는 인간적인 문제로 괴로워하는 모습은 이상적인 초인을 그렸던 과거 슈퍼히어로 영화와 달라진 점”이라고 말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