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기자의 무비홀릭]김기영 감독 1972년작 ‘충녀’

  • 입력 2008년 7월 8일 03시 01분


영화 ‘충녀’의 그 유명한 ‘알사탕 정사’ 장면. 김기영 감독의 1978년 작 ‘살인 나비를 쫓는 여자’에 등장하는 일명 ‘뻥튀기 정사’(작동하는 뻥튀기 기계 옆에서의 정사)와 더불어 김 감독이 연출한 그로테스크한 정사신으로 꼽힌다.
영화 ‘충녀’의 그 유명한 ‘알사탕 정사’ 장면. 김기영 감독의 1978년 작 ‘살인 나비를 쫓는 여자’에 등장하는 일명 ‘뻥튀기 정사’(작동하는 뻥튀기 기계 옆에서의 정사)와 더불어 김 감독이 연출한 그로테스크한 정사신으로 꼽힌다.
‘알사탕 정사’에 그렇게 깊은 뜻이…

김기영(1919∼1998)은 시대를 앞서간 감독이다. 그의 영화 속엔 괴이한 이미지들이 출몰하고, 물질문명과 인간의 동물적 본능이 충돌한다. 한국영상자료원이 최근 DVD로 내놓은 ‘김기영 컬렉션’을 보면서 몸서리쳤다.

1972년 작 ‘충녀(蟲女)’. 후처의 딸로 태어난 명자(윤여정)는 동식(남궁원)이란 남자의 후처가 되는 얄궂은 운명. 유능한 사업가인 부인(전계현)에게 기대어 사는 무능한 남편 동식은 아내의 권위에 눌려 심인성 발기부전을 겪는다. 동식의 아이를 잉태하기 위해 성관계에 몰입하는 명자. 하지만 그녀에겐 악몽 같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으니….

아, 지금으로부터 물경 36년 전에 이런 앞서가는 문제의식과 파격적인 정사 신이? 영화 ‘충녀’에 등장하는 논란의 대사와 장면을 통해 김 감독의 영화 세계를 분석해 봤다.

▽이렇게 앞서갈 수가?=가부장적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좔좔 흐르던 1970년대. 그러나 김 감독은 ‘알파 걸’의 세상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영화에서 강력한 아내의 존재를 인정하는 동식은 동거를 요구하는 명자와 다음 대화를 주고받는다.

“사장님이 저를 필요하다 하셨으니, 서로 살아야 돼요.”(명자)

“우린 서로 사랑하는 건 아니잖아?”(동식)

“그런 건 몰라요. 사랑이란 건 오히려 타락을 가져온대요. 서로 필요한 것만으로 봉사하고 충성하고 희생할 수 있잖아요?”(명자)

“좋았어! 싸구려 사랑보다 그게 보증수표다! 내 처를 한번 보는 게 낫겠어. 얻어맞아도 좋다는 각오가 선다면 살아보자. 내 처는 영웅이야. 그 자신과 관록으로 업계에서도 무서워하는 존재지. 넌 내 처와 대결해야 된다.”(동식)

▽이렇게 논리적일 수가?=경성 치과의전(서울대 치과대 전신) 출신인 김 감독은 감성 예술인 영화 속에 차가운 이론과 논리로 무장한 대사를 심어 넣는다. 대사가 풍기는 ‘먹물’ 냄새는 번식의 욕망이 지배하는 본능의 세계와 매력적인 부조화를 이룬다.

“왜 그렇게 흥미도 없는 부인한테 쩔쩔매시죠? 왜 약한 여자한테 남자는 쩔쩔매야 하나요?”(명자)

“어느 학자의 말이, 남자는 어머니한테 어릴 때부터 쩔쩔매는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오줌 똥 싸고 쩔쩔매고, 사탕 사달라고 쩔쩔매고, 밥 달라고 쩔쩔매고…. 그런 교육이 나중에는 부인한테도 똑같은 이유로 쩔쩔매게 만드는 것이지.”(동식)

“그러니까 공처가는 어머니가 만드는 거군요!”(명자)

영화에서 동식의 아내는 급기야 명자를 남편의 후처로 인정한다. 그러면서 다음 조건을 명자에게 내건다. 복장 터질 만한 상황을 냉철한 지성으로 극복하려는 본부인의 대사 속엔 논리와 숫자의 디테일이 가득하다.

“첫째, 하루를 반으로 쪼개 밤 12시 이후엔 어떤 일이 있어도 (남편을) 돌려보내 줘야 됩니다. 가정질서와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서 가장의 외박을 절대 금합니다. (팬티만 입은 남편의 전신사진을 보여주면서) 이건 남편의 몸. 난 20년을 살아도 상처 하나 안 입혔어요. 동시에 체중 70kg, 혈압 130. 50세가 되면 관리가 필요해요. 체중계를 가져왔으니까 매일 (남편의 혈압과 체중을 재어) 정보를 교환해줘야 됩니다. 따라서 식사, 운동, 성생활, 목욕, 음주, 커피 등 모두 절제시켜야 됩니다.”(본부인)

“그런 걸 다 말입니까?”(명자)

“중년 남자하고 살려면 의학박사가 돼야 합니다. 털도 안 뽑고 그냥 남편을 먹으려다가는 살인납니다.”(본부인)

▽이렇게 깊은 뜻이?=이윽고 명자와 동식은 한국영화사상 길이 남을 베드신을 보여준다. 일명 ‘알사탕 정사’. 명자가 흩뿌려놓은 형형색색의 알사탕 위를 슬라이딩하며 벌이는 정사 장면에는 다음 세 가지 깊은 뜻이 숨어 있었으니….

△어머니가 아이에게 알사탕을 주면서 훈육하듯, 심리적 유아기에 머물러 있는 중년 남자 동식을 19세 명자가 ‘영혼의 어머니’가 되어 오히려 지배한다는 의미 △금지된 사랑은 알사탕처럼 달콤하고 환상적이라는 의미 △등에 박혀 뜻하지 않은 아픔을 주는 알사탕처럼 금지된 사랑은 고통스러운 결말을 잉태할 것이란 의미로 해석된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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