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가 밝아졌다. 한 복판에 덩그러니 놓인 스타인웨이 피아노(늘 그렇지만 이 피아노의 인상은 꽤 차갑다)를 향해 연두빛이 감도는 드레스를 입은 피아니스트가 조심조심 걸어간다.
손수건에 손을 닦고는 짧은 명상. 이윽고 가냘픈 두 손이 건반 위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날콩이 유리 위를 굴러다니는 듯한 모차르트의 콧노래가 시작된다.
김일순은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국립음악원에서 전문연주자 과정과 박사학위를 받은 러시아 피아니즘 계열의 피아니스트이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음에서는 슬라브 향이 짙었다. 싸고 묶어도 어느 결엔가 스며 나오는 그 향은 이미 그녀에게 익숙한 체향이 되어 있었다.
심지어 모차르트조차 ‘러시아적’으로 들렸다.
김일순은 음을 아끼는 연주자였다. 하고 싶은 말을 좀처럼 시원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머뭇거리며, 수줍은 듯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지만 결국 꺼낸 것은 진심이다. 그녀가 목소리를 낮추니 결국 입을 연 것은 모차르트요 차이코프스키요 쇼팽과 라벨이었다.
그녀가 의도하였든 그렇지 않았든 이날 관객들은 그녀 대신 작곡자들과 대화할 수 있었다. 그것은 기묘한 경험이었다.
무대에서 내려온 그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다음 연주회에서는 한 작곡가 위주로 레퍼토리를 꾸미고 싶다고 했다. 가능하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스크리아빈으로 하루를 채워보고 싶다고.
“제 마음을 음악으로 가득 채우고 싶어요. 그러다 보면 관객들에게 여운이 오래도록 남는 연주를 들려드릴 수 있겠죠.”
그녀의, 코끝이 문드러질 정도로 슬라브 향이 짙은 스크리아빈을 꼭 듣고 싶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