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시를 쓰는 사람치고 ‘재 위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 했던 시절, 백석의 시 한 편 손수 노트에 베껴 써 보고 싶지 않았던 이는 드물 것이다. 그 수려한 외모의 청년이 ‘어느 사이에 아내도 없고 집도 없어져서’ 겨울밤 목수네 방 한 칸에 앉아 맑은 소주를 마시며 시를 짓곤 하였을 모습을 떠올려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1912년에 평북 정주에서 태어났고 35년에 시 ‘정주성’을 발표했으니 20대 초반에 시인이 되었다. 근대 문학의 가장 풍요로운 서정성을 확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월북 후의 문학 활동이 거의 연구되지 않았던 시인 백석, 그러나 그 살갑고 절실한 북방정서와 가슴이 턱턱 막혀오는 정서의 울림들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세계가 너무나 큰 고독과 허무감에 젖어 있는 탓에 그는 ‘쌀랑쌀랑 싸락눈’이 내리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살았던 것이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짙게 배어나는 영롱한 연민 때문에 눈물이 당나귀처럼 데굴데굴 굴러가는 것을 목격하는 것은 나만이 아닐 터. 누군가는 그를 가리켜 우리 문학의 북극성이라고 했지만 그는 사슴처럼 산골로 들어가 언 눈 위에 자신의 눈망울을 문지르며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에’ 하염없이 공동체의 운명을 생각하곤 했을 것이다.
김경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