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가 걸어온 길을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극단의 시대’ 등 4권의 명저로 담아낸 91세의 노(老)석학 에릭 홉스봄이 2000∼2006년 했던 강연 원고를 한데 모았다. 홉스봄은 이 책이 20세기 서구 역사를 통렬히 분석한 ‘극단의 시대’의 21세기 보강판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이 책은 20세기의 유산을 안고 출발한 21세기 초반의 세계화, 민주주의, 폭력 등 세계 정치에 대한 깊은 안목을 보여 준다. 원제도 ‘Globalisation, Democracy and Terrorism(2007년)’.
노석학은 세계적으로 전쟁과 테러 등 폭력이 증가하는 것은 자신을 선(善)으로, 상대를 악(惡)으로 규정하는 극단적, 이념적 확신 탓이라고 말한다. 테러의 실제 위험은 테러 그 자체가 아니라 테러로 인한 공포 유발과 그로 인한 비이성적 두려움, 그에 따른 또 다른 폭력이다.
무엇보다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세계화와 민주주의의 위기를 다룬 5장이다. 날로 가속화되는 시장경제의 세계화가 국민국가의 경계를 약화시키고 있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세계화가 민주주의의 위기를 야기한다니. 노석학의 얘기를 들어 보자.
국민국가의 민주주의는 국민에게 삶의 복지를 제공하는 정부의 권위와 법치가 유지될 때 가능하다. 정부가 국민을 위한 법과 질서 같은 가장 강력하고 효율적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민주주의가 유지된다는 얘기다.
그런데 경제의 세계화로 국가의 법과 세금을 피할 수 있는 다국적기업이 늘어나면서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선 시장이 국민에게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났다. 그런데도 정부는 스스로 민간 기업의 경영 방식을 도입하고 공공서비스를 민영화하면서 가뜩이나 약화된 정부의 권위를 시장에 내주고 있다.
홉스봄은 시장이 민주주의를 보완할 수 있지만 대안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시장이 가장 효율적인 결정은 할 수 있지만 공공적인 정치 결정을 할 수 없다는 것.
국민은 점점 정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선거 때 투표 같은 권리 행사에도 별 관심이 없다. 그러면서 시장의 무한경쟁에 내몰려 삶의 질을 보장하지 못하는 정부에 대한 불만은 높아만 간다.
홉스봄은 민주주의가 가장 이상적인 정치체제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럴 때일수록 정부가 국민의 의지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국민의 의지를 무시하면 그 어떤 좋은 해결책도 실제 국민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가늠할 수 없다는 것. 저자는 소련 체제가 실패한 것은 결정을 내리는 사람과 결정을 수용해야 하는 사람 간의 쌍방향 교감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봤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