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그림의 저주 그 섬에 무슨 일이…‘듀마 키’

  • 입력 2008년 7월 19일 03시 00분


◇듀마 키/스티븐 킹 지음·조영학 옮김/488,436쪽·각 1만2000원,1만 1000원·황금가지

오래 남는 것들이 있다. 둔기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얼얼해지기도 하고, 며칠이 지나도 생생히 얽혀드는 감정으로 심란해지기도 한다. 파장을 길게 남기는 것들,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들, 스티븐 킹(사진)의 신작 ‘듀마 키’ 역시 그런 작품이다.

노련한 베스트셀러 작가인 스티븐 킹이 900여 쪽 분량의 긴 이야기에 독자들을 몰입시키기 위해 발휘한 실력을 살펴보자.

‘얼마나 재밌게 썼을까 한번 보자’는 요량으로 첫 장을 펼친 지 불과 얼마 되지 않아 심적 동요가 생긴다. 잘나가는 건축사업가 에드거 프리맨틀의 말 때문이다. 가족과의 여행 계획에 대해 말하던 그는 ‘하필 그때 일이 틀어지고 말았다’라고 말한다. 당황스러운 것은, 그 ‘틀어진 일’이란 것이 공사현장에서 기중기가 역진하는 사고로 ‘오른쪽 두개골의 금+왼쪽 두개골 세 조각으로 분리+갈비뼈 및 오른쪽 엉덩이 박살+오른팔 절단’을 초래한 것이기 때문이다. ‘틀어진 일’ 정도로 표현하기엔 참혹한 사고 아니던가. 일단 주목도 높은 시작이다.

이때부터는 사고 후유증에 시달리는 에드거의 모습에서 상당한 리얼리티를 확보한다. 뇌 안에 세계 최대의 시계방이 24시간 내내 자정을 알리는 것 같은 고통.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해 얇은 피막을 통해 보는 붉은 세상. 자꾸 끊기는 기억, 엉망이 된 어휘 구사력, 세상을 향한 무차별적 적대와 분노. 정신착란으로 그는 간호원들에게 욕을 하고 아내의 목을 조르기도 한다. 주인공의 육체적 고통과 내면적 혼란에 함께 괴로울 지경이다. 실제로 저자는 1999년 대형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을 만큼 크게 다쳤던 경험이 있다. 에드거의 말처럼 과연 ‘죽음을 맛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감정의 노정이 실감난다.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공포감과 스릴을 주는 장치로 그가 이 작품에서 선택한 장치는 ‘미술’이다. 사고 후 아내와 이혼한(혹은 이혼당한) 그는 재활을 위해 ‘듀마 키’라는 플로리다의 해변으로 이사를 가고 그곳에서 뭔가에 홀린 듯이 그리기에 몰두한다. 그림이라곤 전화번호부에 끼적거린 낙서가 다였던 그에게 갑자기 살바도르 달리와 마르셀 뒤샹 뺨치는 천부적인 예술 혼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무 개연성 없이 닥친 행운(책에선 천부적인 소질)에는 감사보다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법.

그토록 아름답고 멋진 해변을 가지고도 인적 드문 이 섬이 늘 음산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 의미심장한 순간마다 에드거의 잘려나간 오른팔에서 가상통증이 느껴지는 것, 그림을 그린 후 한바탕 게걸스럽게 먹은 후에야 자신이 무슨 그림을 그렸는지 찬찬히 볼 수 있게 되는 불가해한 현상 등에서 독자들은 이미 공포의 전주를 느낀다.

초반부에 (혹시라도) 탐미적 광기에 몰두하는 천재 예술가의 이야기인가 혼란을 느꼈던 독자라도 그가 그림으로 아동범죄자의 숨통을 끊어놓기도 하고, 절친한 친구의 병을 깨끗이 낫게 하는 대목에 오면 오싹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제 듀마 키 섬의 소유자인 미스 이스트레이크 집안에 내려졌던 저주와 에드거가 그려낸 불가사의한 그림의 정체가 벗겨지기 시작한다.

스티븐 킹은 각 장이 끝날 때 ‘그림을 그리는 법’이란 짤막한 글을 순서대로 삽입해 두었다. 소설이 처음 시작될 때는 단순히 그리기의 의미에 대해 작가가 심심풀이로 쓴 글 같지만 사건이 전개되면서 소설 속의 내용과 맞물리게 된다. 에드거의 이상한 능력과 듀마 키 섬에 얽힌 저주의 실체를 푸는 단서가 되는 것.

스티븐 킹은 대중적인 장르문학 작가로 평가받지만 이 이야기는 복잡한 사건들이 얼기설기 얽혀가다 끝에서야 제 모습을 드러내므로 독자들의 집중력을 요구한다. 의문의 실마리도 하나로 모아지기까지 교묘히 숨어 있으므로 인내력을 가지고 추리해 볼 필요가 있다. 절대 악의 존재와 유령, 빙의, 살인, 초현실적 능력 등이 ‘미술’과 잘 버무려진 이 세련된 호러 소설은 올 1월 미국에서 출간되자마자 인터넷 서점 아마존닷컴에서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물론 장르 문학 특성상 다 읽고 보면 영화, 드라마, 혹은 또 어디선가 본 듯한 이야기 같다는 의혹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교통사고 슬럼프 후 ‘다시 스티븐 킹다운 소설을 썼다’고 평가받는 그의 최근작으로 감칠맛 나는 공포의 전율을 느껴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 될 것 같다. 물론 그 전율은 책을 덮은 후에도 한동안 머릿속을 휘황하게 할 것이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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