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한 철 무성한 자연의 질서 속에도 이별이 있고 울음이 있다. 인간은 그것을 너무 일찌감치 깨닫는 짐승이라 서글픈 거다. 그래서 밥 한 숟가락을 떠먹고 한 번 겸손해지고 국을 한 입 떠먹고 또 한 번 겸손해지고 하는 거다. 멀찍이 피어난 봉숭아꽃 바라보며 무엇인가를 자꾸만 자꾸만 삼키는 거다.’(‘여름의 양식’ 중에서)
주위에선 촌스럽다 했다. 요즘 세상에 제목이 그게 뭐냐고 했다. 그래도 시인은 기억한다. ‘물 초롱에 쏟아 붓던 바가지 물.’ 누구에겐 하루를 이을 힘이 되고, 누구에겐 세상을 배우는 깨달음이 될. 그걸 닮고 싶었다. 물 긷는 소리.
1987년 등단해 1991년 첫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그 뒤 “계획했던 일은 아니나” 5집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까지 3, 4년 터울로 꾸준히 작품을 선보인 장석남(43) 시인이 두 번째 산문집을 펴냈다. 에세이로는 2000년 ‘물의 정거장’ 이후 8년 만이다.
15일 시인이 근무하는 서울 한양여대 캠퍼스를 찾았다. “시집도 아닌데 무슨 인터뷰까지….” 국밥이나 한 그릇 하자며 손사래 쳤다. 백반집에 앉아 땀방울 식힐 틈, “산문도 시어처럼 정갈하다” 했더니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산문도 소중한 문학 장르지요. 에세이라고 낮춰 보는 건 아닙니다. 그냥 멋쩍어서, 허허…. 시를 쓰듯 문장을 고른 건 맞습니다. 산문도 나름의 운율이 있거든요. 웃어른들은 글 지을 때 글자 하나도 고민하고 고민했어요. 그 운치를 살리려 했습니다.”
예스러운 풍모가 흐르는 게 문장뿐이랴. 자연을 거니는 선비의 향취가 책 속에 가득하다. 정자에 앉아 돌을 깎고, 그 돌로 글씨나 그림을 찍고.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에 몸을 기대어 한시(漢詩)를 음미하고. 연못가 돌멩이에 물을 끼얹으며 세월을 곱씹는다. 음풍농월. 하지만 그게 결코 은둔을 뜻하는 건 아니다.
“은둔거사라고 세상을 등지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제대로 바라보려 거리를 두는 거죠. 글과 자연을 통해 처절한 반성의 기회를 갖는 겁니다. 그저 목소리를 높이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죠.”
“사람이 욕심이 없을 순 없겠죠. 그래도 자연과 사물, 타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배우는 게 있습디다. 억지로 꾸미기보단 자연스레 생기는 마음이죠. 그런 깨침을 담았다면 너무 거창한가요? 그걸 함께 나누는 것도 세상을 향한 외침이죠. 문학이 할 일이 그러합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