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雪)을 읽는 것은 음악을 듣는 것과 같다. 눈에서 읽은 내용을 묘사하는 것은 음악을 글로 설명하려는 것과 같다. 처음 그 일이 일어났을 때는 마치 다른 사람들이 다 잠들어 있을 때 나만 깨어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기분이었다. 고독과 전지전능함이 균등히 반반씩 이룬다.”》
‘소년의 추락사’ 진실 찾아 나선 독신녀
크리스마스이브, 한 아이가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다. 코펜하겐 항구 옆 이층집에 살고 있는 아이 이름은 이사야. 사인은 실족으로 인한 추락사였다. 목격자도, 증거도 없어 경찰도 서둘러 덮어버린 사건. 이때 한 여자가 다가온다. 아래층에 사는 서른일곱 살 독신녀 스밀라였다.
스밀라 카비아크 야스페르센.
부모로부터 나란히 물려받은 두 개의 성(姓)에선 두 갈래로 갈린 태생의 흔적을 읽을 수 있다. ‘카비아크’는 그린란드 이누이트족 사냥꾼인 엄마의 것, ‘야스페르센’은 덴마크 출신 외과의사 아빠의 것이다. 모순적으로 보이는 부모의 결합처럼 그의 삶에서 두 가지 국적은 늘 충돌했다. 마치 자연과 문명, 피지배국과 지배국의 대립처럼. 하지만 다섯 살까지 그린란드에서 자란 그는 덴마크가 속한 유럽 시스템에 강한 거부감을 갖게 된다.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술래잡기였다.
“우스꽝스러운 기억의 파편들이, 내가 덴마크에 도착한 직후에 처음으로 술래잡기를 했던 때의 영상을 불러일으켰다. 재빨리 약자를 제거해버리고, 이어서 자연적 위계질서에 따라 나머지 모든 사람을 제거해버리는 게임의 규칙에 익숙지 않았던 기억의 영상들.”
그가 타고난 또 다른 하나는 눈(雪)에 대한 감각이었다. 눈을 사랑보다 중하게 여기는 스밀라가 아이가 쫓기고 있다는 예감에 사로잡힌 것도 바로 눈 때문이다. “나는 삶에서 일정한 무언가를 닻처럼 내리고 있다. 그걸 방향감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여자의 직관이라고 해도 된다. 뭐라고 불러도 좋다.”
‘스밀라…’는 1992년 발표된 덴마크 작가 페터 회의 추리소설이다. 전문 무용수, 배우, 선원, 펜싱선수 등으로 활동한 페터 회는 세 번째 소설 ‘스밀라…’로 ‘올해의 작가상’ 등 그해 덴마크의 각종 문학상을 휩쓸었고 ‘스밀라…’는 시사주간지 타임의 ‘올해의 책’에 선정됐다.
이 책을 추천한 여행작가 김연미 씨도 “두께가 꽤 되지만 여행길에는 꼭 챙기는 책”이라며 “여행 중엔 짬이 날 때마다 책을 읽는데 이 책은 한번 잡으면 다 읽고 싶을 만큼 흡인력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실들이 한 꺼풀씩 벗겨질 때마다 드러나는 문명의 추악한 모습에 독자들은 책장을 덮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힐지 모르겠다.
범인을 찾기 위해 작동한 스밀라의 직관이 빛을 발하는 것도 이 부분. “이제 나의 목적은 이사야가 왜 죽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 애의 죽음에 대한 미약하지만, 모든 것을 포괄하는 사실을 꿰뚫어보고 조망하는 것.” 스밀라의 뾰족한 직감이 문명의 이기와 서구인의 탐욕을 향해 겨눠질 때 이 책은 추리소설을 가장한 문명 비판서로 돌변한다.
그는 사건을 파헤치려 북쪽 어딘가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싣는다. 그를 외부의 환경으로부터 보호해줄 유일한 무기는 이제 스크루 드라이버뿐. 온갖 풍랑과 추위, 살해의 두려움을 뚫고 그가 캐낸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그 어떤 추리소설의 반전 중에서도 인간으로 태어난 사실이 부끄러웠던 반전은 없었다.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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