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몇 년 전 회자됐던 광고 카피가 머릿속을 스친다. ‘남들이 모두 예스라고 할 때 노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돼라.’ 당시 수많은 ‘예스맨’을 자극시켰던 이 카피의 영향은 꽤 컸다. 카피 덕분인지 모르겠으나 ‘안티’가 유행을 넘어 특권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은 1999년 프랑스의 시사주간지 ‘마리안’에 연재했던 기사들을 묶었다.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저자는 꼼꼼하고 날카로운 필치로 역사 속 ‘노’의 흔적과 파장들을 좇는다.
기원후 73년 로마제국에 저항한 열심당 당원들의 ‘노’부터 스페인의 인디오 학살을 고발했던 신부 라스 카사스의 ‘노’, 드레퓌스 사건의 진범을 홀로 밝혀낸 쇠러 케스트너 상원의원의 ‘노’까지…. 저자는 행여 한 명이라도 빼먹을까 싶어 책 말미에 ‘노라고 이야기한 또 다른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부록 편까지 만들었다.
저마다 ‘노’를 외친 사연들을 보면 꼭 거창한 ‘노’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시작은 미미하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노’도 있었다.
1905년 발트해상을 지나던 전함 ‘크냐지 포템킨 타브리체스키’호. 여기에 탑승한 수병들은 그저 흰 구더기가 우글거리는 쇠고기가 먹기 싫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사소해 보였던 ‘숟가락 반란’은 몇 달 후 민중시위로 번졌고 12년 후 볼셰비키 혁명을 예고하는 신호탄이 된다.
‘노’의 백미는 비장함에 있다. 그것도 적의 부조리가 아닌 자기 진영의 범죄를 고발했을 때 외치는 ‘노’는 뼈를 깎는 고통을 수반한다. 그래서일까. 부와 성공, 명예까지 거머쥔 빅토르 위고가 상원의원 자리를 박차고 20년 망명의 길을 택한 것에 대해 저자는 가장 후한 점수를 준다.
여기서 드는 궁금증 하나.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노’와 백인우월주의 집단인 KKK단의 ‘노’는 같은 ‘노’일까. 예수와 히틀러가 외친 ‘노’는 같은 의미일까. 과연 ‘노’라는 한마디가 지니는 무게는 같은 걸까.
실제로 저자는 이 기사를 연재하며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부닥쳤다.
독자들이 제각각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노’의 기준을 제시하며 항의편지를 쓴 것. 한쪽에서 카스트로를 요구하면 다른 쪽에서는 그를 단호히 배제했고, 지미 헨드릭스는 있는데 짐 모리슨은 왜 빠졌느냐며 항의하는 독자도 있었다. 대부분의 지적은 받아들이면서도 저자는 발음만 같을 뿐인 가짜 ‘노’는 구별해야 한다고 선을 긋는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예스를 이끌어 내거나 암시하지 않는 노는 결국에 가서 어떤 이득도 없다. 그러한 노는 무책임하기 때문에 일관성이 없고, 위험이 없기 때문에 진부하다.”
‘노!’라는 제목이 주는 짧지만 강렬함. 상대를 인정하지 않은 채 반대를 위한 반대만 외쳐온 이들에게 이 책의 제목은 반가울 수 있겠다. 하지만 저자가 제시하는 엄격한 ‘노’의 채점기준에는 뼈아프게 다가올 책이다.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