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丁’자 모양 정자각 대신
‘一’자 모양의 침전 세워
국내에 있는 조선 왕릉 40곳 중 38곳 왕릉에는 있는데 홍릉(洪陵·고종 능)과 유릉(裕陵·순종 능)에만 없는 것은 뭘까? 답은 정자각(丁字閣)이다.
정자각은 조선 왕릉의 표본인 태조 건원릉(健元陵·경기 구리시)부터 25대 왕인 철종 예릉(睿陵·경기 고양시)까지, 조선의 마지막 두 왕인 26대 고종과 27대 순종 능을 제외한 모든 왕릉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건축물. 왕릉 입구인 홍살문과 봉분 사이에 위치한다.
선대 왕의 제사를 모시던 정자각은 조선 왕릉의 핵심 구조로 꼽힌다. 평면이 ‘丁(정)’자 모양이라 ‘정자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런데 경기 남양주시에 있는 홍릉과 유릉에는 정자각 대신 ‘一’자 모양의 침전(寢殿)이 있다. 왜 그럴까. 비밀은 1897년에 있다. 대한제국의 선포. 고종은 조선이 중국과 대등한 나라임을 선포하고 황제가 됐다. 이후 왕릉 형식도 ‘一’자 모양의 침전이 있는 중국 황제릉과 비슷해졌다.
그러면 고종 이전까지 조선 왕릉에 세워진 정자각은 ‘감히’ 중국식 침전을 따라할 수 없어 만든 건축물인 걸까? 그렇지 않다. 조선 왕릉 전문가인 이창환 상지영서대 교수는 “정자각이야말로 중국과 다른 우리 고유의 왕릉관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능 옆에 세운 침전은 임금의 숙소라는 뜻이다. 중국은 능이 황제가 죽어서도 영원히 나라를 통치할 지하 궁전이라고 믿었음을 보여준다.”
조선의 왕릉관은 달랐다. “…우리 제도는 이와 같지 않아 정자각을 능 곁에 세우고 신(神)을 인도해 제사하니 신은 늘 능에 계시고 정자각은 신을 제사하는 곳이다.”(성종실록)
왕의 죽음을 인정해, 왕릉을 왕이 죽어서도 통치하는 위압적 공간으로 규정하지 않은 것이다. ‘一’자 형의 정전(正殿) 앞에 ‘궐’자 모양의 배전(拜殿·절하는 공간)을 돌출시킨 정자각은 봉분 아래 잠든 옛 통치자와 현세의 통치자가 만나는 성스러운 제향 공간으로 거듭났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는 폭 3m 남짓한 길인 참도(參道)가 뻗어 있다. 참도는 좌우로 나뉘는데 왼쪽이 신도(神道·신이 다니는 길), 오른쪽이 어도(御道·왕이 다니는 길)다. 신도와 어도는 높낮이가 다르다. 신도가 더 높고 폭도 넓다. 신도의 평균 폭은 1.68m, 어도는 1.13m.
정자각이 없는 홍릉과 유릉도 홍살문에서 침전까지 참도가 나 있다. 하지만 이 두 능은 특이하게 신도를 가운데에 두고 어도가 둘이다. 그 이유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모든 왕릉에서 박석 깔린 참도의 표면을 일부러 울퉁불퉁하게 해 놓은 이유도 재미있다. 참도에서 넘어지지 않고 걸으려면 자연스레 고개를 숙여야 한다. 봉분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게 하려는 뜻이 담겼다.
의친왕의 손자 이혜원 국립고궁박물관 연구자문위원은 말한다.
“많은 관람객이 신도의 의미를 모른 채 그냥 걸어간다. 신도는 임금도 디디지 못하던 신성한 길인데…. 어도로만 걸으며 선대 왕의 영혼과 함께 걸었을 조선 왕의 엄숙한 기분을 느껴보는 건 어떨까.”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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