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지 않는 ‘한국문학의 샘’ 천년학 타고 하늘로 떠나다

  • 입력 2008년 8월 1일 03시 07분


■ 소설가 이청준 씨 타계

“문학은 불행의 그림자를 먹고 자라는 괴물입니다. 삶의 압력, 현실의 압력이 가중되면 이걸 견뎌 내려는 정신의 틀을 만드는 것이 문학적 상상력이겠지요.”(문학평론가 권오룡 씨와의 대담, ‘이청준 깊이 읽기’ 중에서)

31일 타계한 소설가 이청준 씨는 언어를 통한 관념과 지성의 깊이, 한의 정서를 보여준 작가였다.

1965년 사상계에 단편 ‘퇴원’으로 등단한 뒤 40여 년간 12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일제강점기, 6·25전쟁 등 현대사의 질곡을 겪은 그의 문학적 출발은 ‘삶과 시대의 고통’이었다. 열 살도 되기 전에 아버지, 맏형, 동생을 잃었다. 당시 맏형이 책과 노트에 남겨둔 글은 고인의 문학적 상상력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졌다. ‘고향과 어머니’는 그가 평소 “내 삶과 문학의 뿌리”라고 되뇌곤 했다.

“물레방아 돌아가듯 때 되면 작품을 내고 또 냈다”(2007년 마지막 작품집을 발표하며)는 작가는 쉼 없는 활동만큼 주제 의식도 심오했다. ‘당신들의 천국’에서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를 우의적으로 그려냈으며 ‘병신과 머저리’는 1950년대 전후 소설의 허무주의적인 세계를 뛰어넘어 ‘경험과 마찰’이라는 문제를 다룬 것으로 평가받는다. 2003년에는 25권으로 된 전집(열림원)이 나왔다.

작품 중에는 영화로 만들어진 것도 적지 않다. 소리에 담긴 토속적 정한을 담아낸 ‘서편제’, 어머니의 죽음과 장례식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축제’, ‘선학동 나그네’가 원작인 ‘천년학’은 모두 임권택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임 감독은 “그분 작품이 주는 총체적인 느낌과 깊이에 공감하고 매료됐다”며 “병을 가진 뒤 만나지 못했지만 새 작품으로 볼 수 있기를 기대했는데…. 한국 문학사에 누구보다 큰 기여를 한 대작가”라고 말했다. 단편 ‘벌레 이야기’는 이창동 감독이 ‘밀양’이라는 영화로 만들었다.

고인은 소설 외에도 ‘작가의 작은 손’(1978년) 등 산문집을 통해 문학세계를 드러내기도 했으며 수궁가, 옹고집타령 등 ‘이청준 판소리 동화’(1997) 등을 집필해 우리 소리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투병 중이던 지난해 11월에는 소설집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를 발표했다. “석양녘 장보따리 거두는 마음으로 쓴 책”이라고 했던 이 작품은 그의 마지막 불꽃이 됐다.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등 여러 문학상과 인촌상 등을 수상했다.

소설가 천명관 씨는 “귀를 기울여야 들릴 만큼 조곤조곤 자상하게 말씀하시던 모습, 얇은 담배를 손에 들고 계시던 모습, 수집한 수석에 얽힌 사소한 인연까지 기억하고 계시던 섬세한 모습, 오랜 지인들과의 술자리에 아이처럼 들떠하시던 모습이 선하다”며 “학창시절부터 작품을 통해 존경하고 흠모하던 선생님과 내가 뵌 선생님이 다르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날 빈소에는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와 소설가 박완서 김주영 김원일 김승옥 이인성 임철우 성석제 씨, 시인 채호기 정현종 황동규 성기완 씨, 이근배 한국시인협회장, 문학평론가 김치수 이화여대 명예교수, 정과리 연세대 교수, 김윤식 명지대 석좌교수 등이 찾았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배우 조재현 씨 등도 조문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 겸허를 가르쳐주신 삶의 스승▼

■ 선생님 영전에

선생의 말씀은 말귀를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술자리에서 뜬금없는 말문을 여시면 나는 이제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시나 하며 추이를 살피곤 했다. 그 말귀를 이제 알아들을 만해지니, 선생께서는 훌쩍 이곳을 떠나셨다. 한생을 산다는 것이 결국은 자신을 추스르고, 자기를 이겨내는 과정이라는 것을 선생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나는 배웠다.

지난 연말, 이제 다 써가는 스킨로션을 새로 하나 장만해야 할지 망설이고 계신다는 신문 기사가 나간 며칠 뒤의 일이다. 와병 중에 마무리하신 책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의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막상 가서 보니 30여 명만 가려 청하신 자리였다. 이것으로 영결의 인사를 대신하시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몸을 추스를 수 있을 때 당신 의지로 가까웠던 사람들과 작별하시겠단 뜻으로 읽혔다. 끝의 인사말에서 약간 울먹이셨던 것 같다.

며칠 뒤 쾌유의 뜻을 담아 붓글씨 한 점을 써서 보내드렸다. 등기로 보낸 것이 그만 배달 사고가 났다. 누군가 집어가 버린 것이다. 예감이 좋지 않아 불안했다. 연초에 다시 써가지고 갈게요. 선생의 답장은 단호했다.

“연초에 보러 오시지도, 글씨 새로 써오실 생각도 마세요. 사람을 만나고 헤어져 보낼 때마다 그 느낌이 늘 마지막 같아서 힘드네요. 이청준 드림.”

나는 선생께 가지 않았다. 위독하시다는 말씀을 듣고도 그저 맑게 보내드릴 작정만 했다. 봄에는 십여 년 아껴 기르시던 동백 화분을 고향으로 보내 심게 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묏자리의 정돈까지 부탁하셨다는 고향 분의 전언에는 차라리 속이 상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선생은 늘 이런 식으로 자리 정돈을 하며 살아오신 것을.

작년 봄 한양대 국문과 학생들을 버스 두 대에 싣고 선생 내외분을 모시고서 참으로 호사스러운 봄나들이를 했다. 장흥의 영화 ‘천년학’ 세트장과 당신 생가 마당에서 조분조분 들려주시던 말씀의 풍경은 그대로인데, 선생은 이제 우리 곁에 안 계신다. 선생은 늘 베풀기만 했다. 누리려 들지 않았다. 정말 좋은 것은 갖지 않고 나눠주셨다.

선생 작품 속의 인물들은 늘 경계에서 멈칫댄다. 주저하고 망설이며 속말을 꺼내지 않는다. 웅웅 혼잣소리를 낸다. 저마다 잘난 사람뿐인 세상에서 선생의 붓끝에서 걸어 나온 낮은 목소리들을 통해 우리는 시대의 징후를 읽었고, 맥락을 짚을 수 있었다. 이제 저만치에 모셔두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고 위로가 되던 어른 한 분이 우리 곁을 떠나셨다. 눈길을 밟고 새벽 첫차를 타고 도회지로 떠났던 소년은 이제 고단했던 한생의 뉘를 내려놓고 천년학의 등을 타고 고향 하늘의 위를 훨훨 날고 계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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