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의 말씀은 말귀를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술자리에서 뜬금없는 말문을 여시면 나는 이제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시나 하며 추이를 살피곤 했다. 그 말귀를 이제 알아들을 만해지니, 선생께서는 훌쩍 이곳을 떠나셨다. 한생을 산다는 것이 결국은 자신을 추스르고, 자기를 이겨내는 과정이라는 것을 선생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나는 배웠다.
지난 연말, 이제 다 써가는 스킨로션을 새로 하나 장만해야 할지 망설이고 계신다는 신문 기사가 나간 며칠 뒤의 일이다. 와병 중에 마무리하신 책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의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막상 가서 보니 30여 명만 가려 청하신 자리였다. 이것으로 영결의 인사를 대신하시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몸을 추스를 수 있을 때 당신 의지로 가까웠던 사람들과 작별하시겠단 뜻으로 읽혔다. 끝의 인사말에서 약간 울먹이셨던 것 같다.
며칠 뒤 쾌유의 뜻을 담아 붓글씨 한 점을 써서 보내드렸다. 등기로 보낸 것이 그만 배달 사고가 났다. 누군가 집어가 버린 것이다. 예감이 좋지 않아 불안했다. 연초에 다시 써가지고 갈게요. 선생의 답장은 단호했다.
“연초에 보러 오시지도, 글씨 새로 써오실 생각도 마세요. 사람을 만나고 헤어져 보낼 때마다 그 느낌이 늘 마지막 같아서 힘드네요. 이청준 드림.”
나는 선생께 가지 않았다. 위독하시다는 말씀을 듣고도 그저 맑게 보내드릴 작정만 했다. 봄에는 십여 년 아껴 기르시던 동백 화분을 고향으로 보내 심게 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묏자리의 정돈까지 부탁하셨다는 고향 분의 전언에는 차라리 속이 상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선생은 늘 이런 식으로 자리 정돈을 하며 살아오신 것을.
작년 봄 한양대 국문과 학생들을 버스 두 대에 싣고 선생 내외분을 모시고서 참으로 호사스러운 봄나들이를 했다. 장흥의 영화 ‘천년학’ 세트장과 당신 생가 마당에서 조분조분 들려주시던 말씀의 풍경은 그대로인데, 선생은 이제 우리 곁에 안 계신다. 선생은 늘 베풀기만 했다. 누리려 들지 않았다. 정말 좋은 것은 갖지 않고 나눠주셨다.
선생 작품 속의 인물들은 늘 경계에서 멈칫댄다. 주저하고 망설이며 속말을 꺼내지 않는다. 웅웅 혼잣소리를 낸다. 저마다 잘난 사람뿐인 세상에서 선생의 붓끝에서 걸어 나온 낮은 목소리들을 통해 우리는 시대의 징후를 읽었고, 맥락을 짚을 수 있었다. 이제 저만치에 모셔두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고 위로가 되던 어른 한 분이 우리 곁을 떠나셨다. 눈길을 밟고 새벽 첫차를 타고 도회지로 떠났던 소년은 이제 고단했던 한생의 뉘를 내려놓고 천년학의 등을 타고 고향 하늘의 위를 훨훨 날고 계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