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준씨 등 6명 11일 사투
메루피크 북벽 세계 첫 등정
“읽을 책이 없어 가난 대물림”
짐꾼 딱한 사정에 의기투합
900km 왕복 150여권 기증
아이들 “꿈 이뤄졌다” 환호
하늘이 ‘물 폭탄’을 쏟아 붓듯 폭우가 산을 쓸어내렸다.
지난달 17일 인도 가르왈 지역 히말라야 산맥의 마을 우타르카시(해발 1150m)에서 30km 떨어진 산간마을 다스다(해발 2300m)로 가는 길은 위험천만했다.
전화도 없고, 지도에도 없는 오지. 김세준(39) 조우령(41) 김태만(36) 손중호(57) 왕준호(37) 김형욱(29) 씨 등 6명의 원정대원은 등반 장비와 책 150여 권을 짊어지고 10km나 되는 오지의 수풀을 헤치고 불어난 물길을 건넜다. 대원들은 지쳐 갔다.
“이러다간 우리도 물에 휩쓸리겠는데….” 원정대를 이끄는 김세준 씨는 2년 전 한국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그날도 7월 17일이었다. 폭우로 산길이 끊어졌다. 당시 김세준 씨 등 산악인 8명은 죽음을 무릅쓰고 폭우로 고립된 강원 인제군 북면 한계3리 주민 50여 명의 목숨을 구했다. 주민들은 이들을 영웅이라고 불렀다.
본보 2006년 7월 18일자 A2면 참조 ▶ [자연재해]산악인 8명 사흘 머물며 주민 50여명 구조
김 씨 등 원정대는 7월 13일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의 대암벽 메루피크 주봉(6660m) 북벽 등반에 성공했다. 12일 동안 수직 절벽과 싸운 탓에 몸무게가 10kg 넘게 빠졌다. 등반을 마친 뒤 녹초가 된 이들은 왜 또다시 폭우를 헤치며 오지를 찾아가는 사투를 벌인 걸까.
한 달 전 원정대는 등반 준비를 하면서 다스다 출신의 짐꾼들에게서 안타까운 사정을 들었다. “우리 아들딸들만큼은 쳇바퀴 같은 마을에서 벗어나 더 나은 삶을 누리게 하고 싶어요. 하지만 책조차 제대로 읽힐 수 없으니….”
수입이 1년에 25만 원 남짓한 짐꾼들이 1년 수업료가 100만 원이 넘는 도시 학교에 자녀들을 보내는 건 불가능했다. 가난의 대물림은 이어졌다.
이 얘기를 들은 원정대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우리 꿈이 중요한 만큼 다스다 주민들의 꿈도 값지다. 10년, 20년 뒤를 이어갈 아이들의 꿈을 잃게 하지 말자. 우리 경비가 충분하진 않지만 좋은 책을 구해 마을 학교에 ‘작은 도서관’을 만들어 주자.”
원정대의 막내 김형욱 씨가 책을 사기 위해 베이스캠프를 떠났다. 그는 폭우를 뚫고 900km나 떨어진 델리로 가서 안데르센 동화, 셰익스피어 희곡, 해리포터 시리즈, 과학책, 그림 백과사전 등 영어로 된 책 150여 권을 산 뒤 보름 만에 돌아왔다.
이후 원정대는 메루피크 주봉 등반에 나섰다. 김세준 김태만 왕준호 씨가 평균 100∼110도의 가파른 대암벽, 악천후와 싸움을 벌였다. 절벽에 매달린 침대에서 눈을 붙여 가며 한 뼘씩 올라갔다. 11일 만에 이들은 마침내 메루피크 주봉에 올랐고 다음 날 베이스캠프로 왔다.
기진맥진한 상태였지만 이들은 단 하루를 쉰 뒤 책을 전달하기 위해 다스다로 출발했다. 다스다 주민 250여 명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외지인이 마을을 찾은 것이 처음이었다. 100여 명 아이들과 함께 책을 꽂고, 대출기록부도 만들었다. 책을 뽑아 가는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30대의 교사는 “이렇게 많은 책을 아이들이 어떻게 다 읽느냐”며 눈이 커졌다. 김형욱 씨가 말했다. “오늘 보고 끝나지 않잖아요. 오늘 A를 읽으면 내일 B를 읽을 수 있고 그렇게 1년, 2년, 10년이 지나면 희망이 생길 겁니다.”
귀국한 대원들에게 7월 28일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꿈이 이뤄진 적이 없다”고 자조하던 짐꾼 프렘(31) 씨. “읍내에 나왔습니다. 전화 요금이 없어 금방 끊어야 합니다. 고맙습니다. 아이들이 책을 정말 좋아합니다. 고맙습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