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출신의 자유주의 신학자 미카엘 세르베투스(1511∼1553)야말로 그런 뜨거운 피와 불안정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천문학 기상학 지리학 법학 수학 해부학 의학 등 그의 관심 분야는 끝이 없었다. 특히 의학과 신학 분야에선 뛰어난 천재성을 드러냈다.
열다섯 살 때부터 종교재판을 피해 유럽 곳곳을 떠돌아다니던 그는 ‘신학의 기사’로서 당대의 모든 성벽과 풍차를 향해 덤벼들었다. 종교적 광신의 시대에 그는 감히 삼위일체와 유아세례를 ‘악마의 교리’라고 부인하며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틀렸다고 선언했다.
도망자 신세가 된 그는 자신의 믿음을 누군가에게 편지로 털어놓고 싶었다. 불행히도 그 상대는 장 칼뱅(1509∼1564)이었다. 가톨릭의 교조주의에 맞서 관용의 정신을 외쳤던 칼뱅. 하지만 그는 ‘제네바 신국(神國)’의 통치자가 된 뒤 불관용의 화신이 되어 있었다.
칼뱅은 보관해 오던 세르베투스의 편지를 대리인을 통해 가톨릭 종교재판소에 넘겼다. 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고 가톨릭을 이용해 ‘이단자’를 제거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세르베투스는 감옥에서 도망쳤다.
1553년 8월 13일, 세르베투스는 칼뱅이 신정독재를 펴던 제네바에 나타났다. 칼뱅은 생피에르 교회 예배에 참석한 그를 알아보고 즉각 체포 명령을 내렸다. 외국인을 체포하려면 사전에 고소가 있어야 했지만 칼뱅은 뒤늦게 비서를 고소인으로 내세웠다.
단순히 국외추방형 정도로 끝날 것 같았던 사건은 칼뱅이 직접 세르베투스의 이단성을 증명하는 증언자로 나서면서 종교재판으로 바뀌었다. 칼뱅은 세르베투스를 자극해 논쟁을 유도했다. 쉽게 격분하는 세르베투스는 통제력을 잃고 칼뱅에게 분노를 쏟아냈다.
결국 세르베투스에겐 모든 형벌 중 가장 고통스러운, 즉 산 채로 불태워지는 형벌이 선고됐다. 칼뱅에게 보낸 원고뭉치와 함께 쇠사슬로 화형대에 묶인 세르베투스는 “예수,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절규하며 녹아내렸다.
개신교에서 일어난 최초의 ‘종교적 살인’이었다. 칼뱅은 나중에 자신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화형 대신 참수형 같은 좀 더 완화된 형벌로 바꿔보려 했다고 밝혔지만 의회기록에선 단 한마디의 언급도 찾을 수 없었다.(‘폭력에 대항한 양심’·슈테판 츠바이크)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