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는 조선왕릉]<4>봉분 앞 ‘혼유석’의 비밀

  • 입력 2008년 8월 20일 02시 59분


7~8t 화강암 매끈하게 다듬어

석실 입구 지키는 ‘명품 자물쇠’

조선 왕릉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봉분 앞 돌상 하나.

가로 약 3m, 세로 2m, 높이 50cm의 거대한 직육면체. 얼핏 무덤 앞에 제사 음식 놓는 상처럼 보인다. 왕의 영혼을 지키는 문석인(文石人) 무석인(武石人) 조각의 장엄한 표정도, 봉분을 수호하는 호랑이와 양 조각의 상징성도 찾기 어렵다.

본래 명칭은 석상(石床)이다. 여기서 제사를 지냈을까. 그렇지 않다. 조선 왕릉의 제향 공간은 봉분 아래 정자각(丁字閣)이다. 봉분은 왕조차 발을 들이지 못한 곳이다.

그렇다면 이 멋없는 돌상이 왜 봉분 바로 앞에 있을까.

돌상은 임진왜란 이후 혼유석(魂遊石)이라고 불렸다. 봉분 아래 잠든 영혼이 나와 노니는 돌이라는 뜻이다. 혼유석은 둥근 북을 닮은 고석(鼓石·높이 50cm) 4개가 받치고 있어 무거운 돌을 공중에 띄운 듯한 느낌이다. 고석마다 잡귀를 막는 귀면(鬼面)을 새겼다. 태조 능인 건원릉(경기 구리시), 16대 왕 인조 계비 장렬왕후의 능 휘릉(구리시)은 고석이 5개다.

혼유석은 조선 왕릉만의 독창적 조각이다. 봉분 주변 조각 중 가장 귀하게 여겨졌다. “혼유석은 몸체가 크고 품질이 좋아야 하니 어찌 인물석(人物石)과 쉽게 비교하여 논할 수 있겠는가.”(22대 왕 정조 글을 엮은 전집 ‘홍재전서’ 중)

어떤 점에서 독창적일까. 빛이 나는 듯 매끈한 표면의 광택이 혼유석의 가치를 대변한다. 효종 능인 영릉(경기 여주군), 정조 능인 건릉(경기 화성시) 등의 혼유석은 표면이 요즘 현대 기계로 다듬은 듯 매끄럽다.

혼유석의 석재는 화강암인데 그 표면을 다듬어 광택을 내는 것은 현대 기술로도 힘들다는 게 석장들의 전언이다. 김이순(미술사) 홍익대 교수는 “조선 6대 단종 비 정순왕후의 능인 사릉(경기 남양주시) 조성 과정에서 석장 40명이 열흘간 혼유석에만 매달렸다”고 말했다.

혼유석은 무게가 7, 8t에 이른다. 조선 왕릉 봉분의 평균 높이는 해발 53m. 표면에 흠이 생기지 않게 봉분 앞으로 옮겨오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건릉 조성 당시 혼유석을 옮기는 데 1000명이나 동원됐다.

이처럼 혼유석은 조선시대 명품 중의 명품이다. 이 최고급 명품이 봉분 앞에 자리 잡은 비밀은 혼유석 아래에 있다.

혼유석 밑에는 박석이 있고 그 아래에 왕의 시신이 안치된 석실로 연결되는 통로가 있다. 이 통로는 모래 자갈 석회를 섞은 반죽으로 채웠다. 엄청난 무게의 혼유석을 들어내지 않고서는 석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셈.

이 덕분에 조선 왕릉은 도굴을 피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9대 성종 능인 선릉(서울 강남구 삼성동)과 11대 중종 능인 정릉(삼성동)을 훼손했을 뿐이다.

혼유석은 왕의 주검을 묻은 지하 밀실을 영원히 봉인한 ‘명품 자물쇠’였던 것이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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