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년 전 유럽에 처음으로 ‘춘향전’을 소개했던 프랑스어 번역판 ‘향기로운 봄(春香·Printemps Parfum´e)’ 원본이 발견됐다.
‘향기로운 봄’은 한국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었던 홍종우(1854∼1913)와 프랑스에서 작가 J H 로니가 협력해 번역한 것으로 1892년 ‘기욤 총서’의 한 권으로 발간됐다.
1936년 몬테카를로에서 춘향전을 각색한 발레 ‘사랑의 시련’을 초연한 러시아 안무가 미하일 포킨(1880∼1942)은 작품을 구상하면서 이 책을 무용 대본의 토대로 삼았다. ‘사랑의 시련’은 2006년 국립발레단에 의해 70년 만에 복원돼 재공연됐다.
‘사랑의 시련’의 초연 자료를 다수 발굴한 연극평론가 김승열(프랑스 파리 제8대학 공연예술학 박사과정) 씨는 21일 “미하일 포킨과 야수파 화가 앙드레 드랭이 만들었던 발레 ‘사랑의 시련’에 대한 박사논문을 집필하다 최초의 프랑스어판 춘향전 ‘향기로운 봄’을 최근 프랑스 고서점에서 찾아냈다”고 밝혔다.
이 책은 그동안 국내 학계에서 복사본으로 연구된 사례는 있지만 원본은 희귀본이나 다름없다.
프랑스어 버전의 ‘향기로운 봄’은 원래 춘향전과 다른 점도 많다. 춘향은 기생이 아닌 서민의 딸로 나오고 월매도 나오지 않는다. 광한루에서 그네를 타고 있는 춘향에게 반한 이몽룡은 여장(女裝)을 한 채 춘향에게 접근하고, 옥으로 찾아간 이몽룡이 창살 사이로 두 손을 벌려 춘향과 키스를 하는 장면도 나온다.
“여장을 한 이도령을 만나 즐겁게 논 춘향은 그를 ‘사또의 딸’이라고 확신한다. 이도령과 헤어지고 늦게 집에 들어와 춘향은 피곤해 잠에 빠져든다. 춘향은 용이 자신의 몸을 휘감는 꿈을 꾼다….”(본문 중에서)
그는 “이도령의 정체성을 ‘용’으로 해석하고, ‘사또’라는 직함을 ‘만다린(중국 관리의 직함’)으로 번역했다”며 “‘사또의 딸’ 등 다른 책에서는 나오지 않는 표현들이 자주 겹치는 것을 볼 때 ‘향기로운 봄’은 포킨 발레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작가인 로니는 ‘향기로운 봄’ 서문에 “조선의 고위 관리인 홍종우가 이 이야기를 소개해줬고 우리는 그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썼다. 로니는 또 ‘금준미주천인혈(金樽美酒千人血)’로 시작되는 어사 이몽룡의 시를 ‘전원시’로 규정하며 “이 이야기 속에서 변사또를 비롯한 악인들이 아무도 죽지 않는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김 씨는 “포킨은 서양의 비극에는 주인공들이 죽는 경우가 많은데 ‘춘향전’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낯설게 여긴 것 같다. 그래서 ‘사랑의 시련’을 원숭이 춤이 등장하는 등 밝고 익살스러운 발레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