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연구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인물을 중심으로 볼 수도 있고, 사건 위주로 역사를 파헤칠 수도 있다. 김건우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연구원은 역사 속 공사(公私) 문서들을 현미경 들이대듯 꼼꼼히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역사를 공부한다.
‘구한말 궁내부의 공문서 관리 규칙에 관한 일고찰’ ‘갑오개혁기 공문식과 공문서의 변화’ ‘갑오개혁기 대한제국기의 사령장 관고(官誥)에 관한 연구’ 등의 논문을 쓴 그는 최근 단행본 ‘근대 공문서의 탄생’(소와당)을 펴냈다. 1894년 갑오개혁을 기점으로 ‘신식(新式)’ 문서가 도입된 배경과 근대적 문서의 도입으로 인한 변화를 살폈다.
○ 1894년 모든 문서에 독자 연호 사용
그는 우선 1894년 6월 28일 군국기무처가 법률안인 ‘의안(議案)’ 제1조를 통해 국내외 모든 공사문첩(公私文牒)에 개국기년(開國紀年)을 사용하고, 중국 연호 광서(光緖)를 폐지하기로 결정한 사실에 주목했다. 수세기 동안 사용해 오던 중국 연호를 버리고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기로 한 것은 근대국가로 들어선 조선이 자주성을 찾기 위해 취한 조처로 해석됐다.
이어 1895년 9월 9일 고종은 조칙을 내고 행정에 관한 조서, 칙서 및 공문서에 태양력을 사용하도록 했다. 김 연구원은 “서구의 근대 시간을 수용해 국제적 기준으로 일치시켰다”면서 “독자 연호와 태양력을 사용함으로써 당대의 관념을 획기적으로 전환시켰다”고 설명했다.
갑오개혁 이전까지 문자생활에서 보완적 지위에 머물렀던 국문의 지위가 높아진 것도 문서 근대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1894년 7월 8일 정부는 ‘의안’을 통해 ‘모든 문서와 기록물에 외국어 표기를 국문으로 번역하라’고 명령했다. 개항 이후 서구와 각종 조약을 체결하고, 외교관 군인 사업가 등 외국인 방문이 빈번해짐에 따라 의사전달을 명확히 하기 위해 서구 용어를 국문으로 가차(假借)할 필요성이 대두됐기 때문이다.
4개월여 뒤인 1894년 11월 21일에는 ‘법률, 칙령은 모두 국문으로써 근본을 삼고 한문을 부역(附譯)하거나 혹은 국한문을 혼용할 수 있다’는 조항이 만들어졌다. 1895년 12월 12일 자주독립과 내정개혁 실시를 천명한 고종의 홍범 14조의 서고문(誓告文)은 이 조항에 따라 순한문체, 순국문체, 국한문혼용체 등 3가지로 반포됐다.
그러나 1899년의 한 문서에 주한 프랑스공사 콜랭 드 플랑시의 이름을 ‘葛林德(갈림덕)’이란 한자로 적고, 비슷한 시기의 다른 문서에는 영국인 함장의 이름을 ‘시미트도리언’이라는 한글로 기록하는 등 문자 사용의 혼란상은 한동안 계속됐다.
○ 日 입김 커지며 정부기관지 ‘관보’ 도입
김 연구원은 근대 문서 형성 과정에서 일본에 받은 영향도 살폈다. 그는 관보(官報)를 대표적 사례로 들면서 “1883년 7월 2일 일본이 정부 홍보기관지로 발행하기 시작한 관보의 모델을 조선 정부가 그대로 차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연구원은 “공문서 제도의 특징을 보면 특정 시점의 국가 정책과 개혁 방향, 사회적 변화를 읽을 수 있다”면서 “한국 근대 공문서의 변화를 보면 위기의식에서 개혁을 시작했다가 일본의 영향을 점점 더 많이 받게 되고, 결국 국권 상실로 이어지는 역사의 여정과 궤를 같이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