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는 조선왕릉]<5>儒-佛-道사상의 결정체

  • 입력 2008년 8월 27일 02시 46분


부속 사찰 세워 극락왕생 기원

봉분 주변 조각에도 불교 사상

경기 화성시 용주사는 특이하다.

사찰 입구인 일주문을 들어서면 붉은색 칠을 한 홍살문이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훼손됐다가 올해 6월 약 100년 만에 복원됐다. 그런데 홍살문은 조선 왕릉 입구를 나타내는 문이다. 궁궐, 관아에서도 볼 수 있지만 사찰 홍살문은 용주사가 유일하다.

홍살문을 지나면 삼문(三門)이다. 중앙의 대문 좌우에 문이 하나씩 더 있다. 전형적인 궁궐 건축 양식. 삼문 앞에는 화마를 물리친다는 해태 한 쌍이 있는데 해태 역시 궁궐에서나 볼 수 있는 조각. 대웅보전 앞마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소맷돌(난간) 형태와 소맷돌에 새긴 구름은 조선 왕릉의 제향공간 정자각(丁字閣) 계단을 꼭 닮았다.

비밀은 용주사에서 800여 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사도세자의 능인 융릉에 있다. 용주사는 융릉에 딸린 사찰이다.

○ ‘숭유억불’ 정책과 다르게 내세관은 불교적

조선 왕릉마다 능에 묻힌 왕의 극락영생을 비는 사찰을 둔 것이다. 왕릉 사찰은 조포사(造泡寺)라고도 불렸다. 선대왕에게 제사 지낼 때 올릴 두부를 만드는 절이라는 뜻이다. 500년 내내 숭유억불의 조선 시대에 선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사찰을 세웠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내세관은 불교적이었던 것이다. 서울 강남 복판의 봉은사도 성종 능 선릉(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딸린 사찰이다. 세종 능 영릉(경기 여주시)의 신륵사, 세조 능 광릉(경기 남양주시)의 봉선사도 왕릉 사찰이다.

조선 왕릉의 봉분 주변 조각에도 불교 사상이 녹아 있다.

봉분 앞 장명등은 사실 사찰의 석등과 다를 바 없다. 조선 시대 내내 사찰 창건을 억제해 석등 건조는 드물었다지만 석등은 장명등 형태로 이어졌던 것이다. 세종실록에 태종 능 헌릉(서울 서초구 내곡동)의 장명등에 불 켜는 일을 논의한 기록이 있어 조선 초기에는 실제로 기름등잔을 놓아 왕릉을 밝혔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태조 능 건원릉(경기 구리시), 헌릉 등 봉분을 둘러싼 병풍석에는 낯선 형상이 새겨져 있다. 불교에서 부처를 경각시키거나 기쁘게 할 때 쓰이는 방울인 금강령(영탁), 번뇌를 깨뜨리고 불도를 닦을 때 쓰는 도구인 금강저(영저)다. 융릉 봉분은 불교의 상징인 연꽃 봉우리 조각으로 둘러싸였다. 왕의 영혼이 잠든 곳을 불심(佛心)이 지키고 있는 셈이다.

○ 태극문양-산신석 등 도교와 전통신앙도 어우러져

그런데 영탁과 영저 중간에는 음양(陰陽)의 이기(二氣)가 생성된 근원인 태극무늬가 새겨져 있다. 정자각 계단 소맷돌 아래에도 태극무늬가 있다. 불교뿐 아니라 음양의 조화를 중시한 도교 사상이 함께 녹아 든 것이다. 정자각에서 봉분을 바라봤을 때 정자각 오른편에 있는 돌도 눈여겨봐야 한다. 평균 가로 1.4m, 세로 0.9m의 돌 산신석이다. 왕릉 조성 이전 산을 지키던 산신에게 왕릉으로 산을 해친 미안한 마음을 제사지낸 곳. 산신 사상이라는 우리 고유의 민간 신앙까지 조선 왕릉에 어우려져 있다. 조선 왕릉은 선조를 기리는 유교의 효 사상과 불교, 도교, 민간 신앙 등 수천 년 전통 사상과 철학이 한데 집적된 결정체인 것이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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