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키운 건 책… 아직도 ‘허기’ 느껴”

  • 입력 2008년 9월 4일 03시 00분


“어린 시절부터 책만 들면 어머니가 ‘밥 먹어라’라고 부르는 소리도 안 들렸습니다. 등짝을 맞기도 했지만, 책은 그리 읽어야 제 맛이지요.” 김열규 서강대 명예교수는 지금도 책만 들면 흐뭇하다. 평생 하고도 넘치는 사랑. 책과 함께해 행복했고 행복하다. 사진 제공 비아북
“어린 시절부터 책만 들면 어머니가 ‘밥 먹어라’라고 부르는 소리도 안 들렸습니다. 등짝을 맞기도 했지만, 책은 그리 읽어야 제 맛이지요.” 김열규 서강대 명예교수는 지금도 책만 들면 흐뭇하다. 평생 하고도 넘치는 사랑. 책과 함께해 행복했고 행복하다. 사진 제공 비아북
평생 책읽기 정리한 ‘독서’ 펴낸 김열규 서강대 명예교수

‘책 읽기와 함께한 지난날을 돌아보니, 그 오랜 자국들이 새삼스럽다. 눈밭에 찍힌 발자국 같아 보인다. 이제 눈꽃이라도 필까? (…) 그래도 아쉬움이 있다면, 그건 미처 못 읽은 책들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고희(古稀)도 지난 세월. 일생 ‘책벌레’라 불렸다. 그런데도 여전히 책이 고플까. 전작 ‘한국인의 자서전’ 등에서 한국인 연구를 천업(天業)으로 삼아 온 국문학자 김열규(76) 서강대 명예교수는 “온전히 새 책 욕심이라기보다 이제는 아련한 ‘첫사랑’ 같은 책을 되찾고 싶은 속내”라고 말했다. 그 애정을 한데 모은 책이 4일 ‘독서’(비아북)로 출간됐다.

3일 오전 경남 고성군 고향의 자택에서 전화를 받은 김 교수는 이 책을 ‘자서전’이라고 불렀다. “거창하게 자평할 염치는 없으나 책이 곧 삶이었소.” 소담한 목소리로 책에 담긴 속내를 전하는 김 교수의 ‘독서론’을 들었다.

―책을 통해 인생을 정리한다니 비장한 듯합니다.

“마무리 짓는단 뜻보단 고마움을 표한 거요. 책이 없었다면 밥벌이도 못 했을 터이니, 허허. 게다가 한 번쯤 돌아볼 나이도 됐고. 겸해서 점점 책이 덜 읽히는 세태도 함께 얘기해보고 싶었다오.”

―왜 요즘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다고 생각합니까.

“‘참 즐거움’을 잘못 안 게 아닌가 싶소. 감각적 쾌락에만 주목한다고나 할까. 시각 자극이 넘치는 탓도 있겠지요. 영상은 인간을 반사적 즐거움에 매달리게 만드니. 책 읽기는 마음을 ‘가다듬는’ 즐거움이 있지요. 물론 쉽진 않지. 하지만 어려울수록 즐거움은 더 깊어진다오.”

―경제 불황에 빡빡한 살림살이…, 그러다 보니 책에도 손이 안 갑니다.

“이보오, 기자 양반. 우리 세대는 일제강점기부터 6·25, 4·19까지 온갖 일을 겪었소. 더 숨 가쁘게 살았어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단 말이오. 주5일제만 봐도 그렇소. 우린 주말 이틀 노는 건 상상도 못 했어요. 바쁜 형편이 책 안 읽는 구실이 되어선 안 됩니다. 독서는 자신의 인간 가치를 살피는 일이라오. 배가 고프듯 ‘머리가 고파하는’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지. 머리 고픔은 책 예술 자연을 통해서만 채울 수 있소.”

―그래서 16년 전 미련 없이 고향으로 내려가신 겁니까.

“허어, 객지보다 훨씬 귀한 곳으로 왔는데 왜 내려간다고 합니까. ‘낙향(落鄕)’이 아니라 ‘상향(上鄕)’이라 불러야지요. 난 항상 인문학이나 문학하는 이들에게 상향을 권합니다. 자연 속에서 책을 읽는 것이야말로 자아를 닦는 길이라고. 자기 관리야말로 인문정신의 극치니까요.”

―책에 ‘날 키운 건 이데올로기도 전쟁도 아닌 오로지 책’이란 대목이 있던데요.

“인간의 가치가 어떤 이념보다 높다고 믿기 때문이오. 음…, 아버지는 남로당 당원, 경무대 간부였던 이모부의 집안은 북한군에 몰살당한 개인사의 영향도 있겠지. 좌우 안 보고 한 길을 걸으려 노력했소. 이젠 빨갱이 ‘흰갱이’-난 우익을 이리 부르오-편 가르기에 휘둘릴 필요가 없는 세대의 세상이잖소. 자유롭게 인간의 의미를 캐는 인본주의자들이 많아지길 기대합니다.”

―책 많이 읽는 비법이란 게 있을까요, 꼭 읽어야 할 책도 추천한다면….

“독서란 등산과 같지요. 한 발 한 발 내디딜 수밖에. 읽다 보면 속독 능력도 커집니다. 얼른 속독한 뒤 다시 숙독하는 방법도 권할 만하오. 힘들게 정상에 올라 느끼는 기쁨과 보람도 등산과 닮았다오. 추천작은, 릴케의 ‘말테의 수기’와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 한국인이라면 ‘삼국유사’도 꼭 읽어야죠. 우리 최고의 판타지니. 최근엔 에이미 추아의 ‘제국의 미래’와 타샤 튜터의 ‘타샤의 식탁’도 재밌게 읽었소.”

―다음 책도 궁금합니다.

“한국인과 ‘도깨비’에 대한 글이 곧 끝날 거요. 요즘 사회엔 도깨비가 너무 바글바글하오. 도깨비는 우리랑 닮았지만 괴물이자 정체불명인 존재요. 매사에 잘난 척 알은척하려 들고, 자기 목소리 높이기 바쁘고, 자기 즐거움에만 탐닉하며 남을 괴롭히는. 독서는 그 도깨비를 몰아내는 좋은 방법 중 하나요.”

―모두의 마음속에 살고 있는 도깨비 말씀이군요.

“허허, 이제야 좀 말귀가 트이는구먼.”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김열규 서강대 명예교수

△1932년 경남 고성 출생

△서울대 국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국문학 및 민속학 전공

△서강대 국문학과 교수, 미국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객원교수

△저서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한국인의 자서전’ ‘욕, 그 카타르시스의 미학’ ‘한국의 문화 코드 열다섯 가지’ ‘고독한 호모디지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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