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글이 주는 감동을 새삼 느끼게 하는 책이다.
이 책이 소개한 조선시대 산문에선 옛 글의 상투성이나 낡은 사유를 찾아볼 수 없다. 옛 사람의 ‘정신적 고갱이’가 현대인과 깊은 공감을 이룰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은 17∼19세기 산문가 23명의 글 160여 편을 번역하고 그 멋과 의미를 설명했다.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정약용처럼 잘 알려진 인물도 있지만 노긍(1738∼1790)처럼 저자가 발굴해낸 작가도 있다. 한문학 대중화에 힘써 온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10여 년 동안 이 시기의 작품을 발굴했다.
책에 실린 산문은 규범적인 정통 유학의 문체로 정치 철학 도덕을 논한 고문(古文)이 아니다. 짧은 길이에 서정적 내용, 사회 통념을 거부한 주제, 파격적 문체, 시적 감수성이 특징인 소품문(小品文)이다.
저자는 18, 19세기 소품문에 영향을 미친 허균(1569∼1618)의 작품부터 소개한다. 부조리한 현실을 직설적으로 꼬집은 산문의 참맛이 드러난다.
‘통곡의 집(慟哭軒記·통곡헌기)’은 새 집을 지어 ‘통곡헌’이라 이름 지은 조카 허친에 대한 산문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즐길 일이 얼마나 많은데 상을 당한 자식이나 버림받은 여인이 하는 행위인 곡을 내걸다니…” 하며 허친을 비웃는다.
그러나 허균은 좋은 시대를 만나지 못해 통곡한 옛 사람들의 이야기를 꺼낸 뒤 “그분들이 살던 시대와 비교할 때 오늘날은 훨씬 더 말세에 가깝다. 국가의 일은 갈수록 그릇돼가고 선비의 행실은 갈수록 허위에 젖어 들어가며…만약 저 여러 군자가 이 시대를 직접 본다면…통곡할 겨를도 없이 바위를 가슴에 안고 물에 몸을 던지려 하지 않을까”라고 꼬집는다.
이용휴(1708∼1782)의 산문 ‘이 사람의 집(此居記·차거기)’은 짧은 분량이 인상적이다.
“이 집은 이 사람이 사는 이곳이다. 이곳은 바로 이 나라, 이 고을, 이 마을이고 이 사람은 나이 젊고 식견이 높으며 고문을 좋아하는 기이한 선비다. 만약 그를 찾으려거든 마땅히 이 글 속으로 들어와야 하리라! 그렇지 않으면 쇠신발이 뚫어지도록 대지를 두루 돌아다녀도 끝내 찾지 못하리라!”
이 글의 글자 수는 53자에 불과하다. 안 교수는 이 글에서 아홉 번이나 쓰인 ‘이(此·차)’ 자에 의미가 숨어 있다고 말한다. ‘이’의 반대어인 ‘저(彼·피)’는 조선 사회에서 신분, 지위, 집안, 경제적 능력, 외모 등 외면적인 것을 뜻했다. 이용휴는 ‘저것’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사회의 관념을 비판하고 ‘이 사람 자체’를 보라고 역설한 것이다.
불온하고 괴기한 소품문을 썼다는 이유로 거의 잊혀진 작가 노긍은 ‘우렛소리를 듣고 놀라서(驚說·경설)’에서 “충성하지 않고 효도하지 않고 우애하지 않고 공손하지 않고…하는 짓거리마다 하늘의 신에게 죄를 얻을 인간들…그 자리에서 불태워 죽이는 사건이 발생해야 하건만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소문은 끝내 듣지 못했다”며 세상을 향한 독설을 내뿜는다.
성균관 유생으로 있다가 왕이 출제한 문장시험에 소품체를 써 징벌을 받기도 한 이옥(1760∼1815)이 주막의 종이창에 뚫린 구멍을 통해 본 저잣거리를 그려낸 ‘시장(市記·시기)’도 독특하다.
“돼지의 네 다리를 묶어서 들쳐 메고 오는 자가 있고, 청어를 묶어서 오는 자가 있고, 청어를 주렁주렁 엮어서 오는 자가 있고, 북어를 안고 오는 자가 있고, 대구를 손에 들고 오는 자가 있고…갔다가 다시 오는 자가 있고, 왔다가 다시 가는 자가 있고….”
단순한 묘사만 반복하면서도 수많은 인물의 행동과 특징을 다채롭게 잡아낸 파격적 구성이 현대 산문을 떠올리게 한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