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대에 선물로 준 ‘1935만㎡ 녹지’
조선 왕릉은 ‘자연과 어우러진 인공 정원’이라는 별칭에 걸맞게 숲도 울창하다. 이 숲은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1790년(정조 14년) 융릉(경기 화성시) 일대에 심은 소나무가 45만3300여 그루에 달했다. 태종은 아버지 태조의 능인 건원릉(경기 구리시) 주변의 잡풀을 베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으라고 명했다. 영조는 효종 능 영릉(寧陵·경기 여주군)에 직접 잣나무를 심었다.
이뿐 아니다. 왕릉에 나무가 적을 때는 나무를 보충하고, 나무가 제대로 뿌리를 내렸는지를 왕에게 정기적으로 보고했다. 왕릉에 심은 나무의 수도 기록했고 함부로 벌목한 자는 엄하게 처벌했다.
왕릉에 계획적으로 나무를 심은 뒤 집중 관리한 것이다. 왕릉은 도성에서 10리(약 4km) 밖, 100리(약 40km) 안에 조성하라는 기준에 따라 대부분 수도권에 자리 잡았다.
도심의 녹지를 보존하는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 정책이 1971년에 시행됐으나 수백 년 전 조선 시대에 이미 정착된 셈이다.
나무의 종류와 위치도 계획적이다. 봉분 뒤에서 ‘신(神)의 정원’의 배경이 되는 숲은 소나무 숲이다. 봉분을 중심으로 죽은 자의 공간에는 소나무 젓나무 갈참나무 떡갈나무를, 왕릉 입구 홍살문에서 제향 공간 정자각에 이르는 곳에는 소나무 오리나무를,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에서 홍살문에 이르는 진입 공간은 소나무 떡갈나무 젓나무를 심었다.
이는 나무마다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세조 때 문신 강희안이 지은 원예 책 ‘양화소록’에 따르면 소나무는 명당의 기둥이요, 나무 중의 나무로, 제왕을 상징했다. 십장생의 하나로 왕조의 지속적 번영을 뜻한다.
생태학적으로도 소나무 숲에는 지표를 낮게 덮는 지피식물이 자라지 못해 곤충이 없다. 곤충이 없으니 개구리가 없고 불길한 징조로 여겨진 뱀도 살지 못했다.
봉분 주변의 떡갈나무는 껍질이 두꺼워 산불에 강하고 줄기가 곧게 자라기 때문에 왕릉의 ‘방호수(防護樹)’ 역할을 했다. 정자각 앞에는 5월경 흰색 꽃이 피는 때죽나무도 심었는데, 밤에 정자각 앞을 환하게 밝히는 의미가 담겼다고 한다.
홍살문 주변의 오리나무는 습지에 강하고 뿌리가 많이 뻗는다. 이 공간이 지대가 낮은 습지여서 많은 비에 토양 유실을 막기 위한 기능을 고려한 것이다.
정자각 뒤에서 봉분 앞까지 펼쳐진 언덕인 사초지(莎草地)의 푸른 잔디까지 종자가 관리된 점도 놀랍다. 현 독립문(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터에 있었던 ‘모화관(慕華館)’에서 잎이 가늘고 짧은 ‘한국형 들잔디’만 왕릉에 공급한 것이다.
이 전통은 현재까지 이어졌다. 6대 단종 비 정순왕후의 능 사릉(경기 남양주시) 등 왕릉 5곳 인근의 문화재청 양묘장에서 왕릉 나무의 혈통을 키워 왕릉에 공급하고 있다. 왕릉 나무는 모두 ‘족보 있는 나무’인 셈이다.
인근 도로변에 줄지은 젓나무 군락이 유명한 세조 능 광릉(경기 남양주시)의 울창한 숲은 국립수목원의 기반을 마련했다. 900여 종 수목이 어우러진 이곳은 현재 유네스코 지정 생물권 보전 지역 등재가 추진되고 있다. 태종 능 헌릉, 순조 능 인릉(이상 서울 서초구 내곡동)의 오리나무 숲은 서울시 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됐다. 수도권 일대 조선 왕릉의 녹지를 모두 합친 면적은 1935만3067m²에 이른다. 조선의 철저한 녹지 보존 정책이 후대에 건네준 선물이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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