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하나를 번역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면 고개부터 갸우뚱거릴 사람이 많다. 하지만 정지영(71·사진) 서울대 불문과 명예교수는 스스로 그 길에 뛰어들었다.
정 교수는 1984년부터 프랑스 작가 로제 마르탱 뒤가르의 소설 ‘티보가의 사람들’(민음사)의 번역에 나서 최근 ‘별권·회상’ 편으로 완역을 마쳤다. 이 소설은 1922년부터 1940년까지 18년여간 발표된 작품으로 번역본은 6권으로 완간됐다. 24년간 원고지 2만 장이 넘는 대역사를 마친 노학자는 어떤 소회를 가슴에 담았을까. 10일 오전 카랑한 목소리로 너털웃음을 던지는 정 교수의 말을 들어봤다.
○ “학자로서 조금이나마 학문에 기여해 뿌듯”
―오랜 작업을 끝내 기분이 남다를 듯합니다.
“시원합니다. 이제야 내 할 바를 다한 것 같아요. 불문학자로 살아온 인생, 조금이나마 학문에 기여를 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허허.”
―‘티보가의 사람들’을 번역하게 된 연유가 궁금한데요.
“1963년인가, 대학원에 있을 때였죠. 은사이신 이휘영 선생께서 이 소설 가운데 ‘회색 노트’ 편 번역을 우리에게 맡겼습니다. 변변한 불한사전도 없던 시절이라 포기했죠. 이후 마음에만 담아뒀는데 1984년 청계연구소라는 출판사를 하던 동서가 권유를 합디다. 일본에선 위대한 소설이라며 많이 읽는데 왜 국내엔 번역본이 없냐고요. 안 그래도 기억이 생생한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지요.”
―소설을 간단히 소개해주신다면….
“한 편의 대하소설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노년까지 인간이 겪고 생각하는 보편적인 것들이 담겼습니다. 알베르 카뮈는 이 소설의 작가를 ‘영원한 현대인’이라고 불렀죠. 20세기는 물론이고 21세기에 읽어도 문제가 없습니다. 소설을 끝낸 작가에게 다음 작품은 뭐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말했답니다. ‘여기에 모든 게 있으니 더 쓸 것이 없다’고.”
○ 번역 도중 3년 걸려 불한사전 펴내기도
―번역하는 데 어려운 점도 많았겠습니다.
“힘들 게 뭐가 있겠소, 얼마나 즐거운 일인데. ‘티보 가의 사람들’은 재밌는 소설입니다. 읽다 보면 끌려들어가요. 언어학적으로도 흥미롭죠. 프랑스 사전들도 단어 용례를 쓸 때 이 소설의 문구를 많이 가져다 쓸 정도지요.”
―불한사전을 내신 적도 있는데요.
“번역을 하다 보니 아쉬운 점이 많았어요. 다음 세대는 좀 더 편하게 프랑스어를 배웠으면 하는 바람이었습니다. 1995년부터 졸업생 20명과 3년 동안 작업해 ‘프라임 불한사전’을 펴냈습니다. 언어학자들은 사전 편찬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정확한 해석을 도와주는 사전이야말로 문화와 문화를 이어주는 가교입니다.”
―우문인지 모르겠지만 번역이란 무엇입니까.
“번역은 글 쓰는 것과 똑같습니다. 오랜 기간 공부해 실력을 쌓아야 합니다. 요즘 젊은 번역가들이 속성으로 번역물을 내놓는 것은 스스로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급한 오역은 원작가는 물론이고 독자에게도 죄를 짓는 거니까요. 인생도 마찬가지 아니오. 제대로 된 준비 없이는 일을 그르칠 뿐입니다.”
―평생의 작업을 마쳤으니 이제 뭘 하십니까.
“할 일 많습니다. 사전도 다시 손봐야 하고 공부할 것도 많고요. 건강에 문제없으니 계속 일해야죠. 몸이 허락하는데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죄악이지요.”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