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을 비틀고 패러디하는 데 급급했던 과거의 경향과 달리 올가을 공연은 원작의 무게감을 살려내는 정통 연극이 눈에 띈다는 게 특징이다. 가벼움 일색이라고 비판받는 최근의 연극 풍토에 묵직한 고전의 맛은 자극이 될 참이다.
유라시아셰익스피어극단의 ‘리처드 2세’(26일∼10월 12일·서울 국립극장·02-741-8111)가 그렇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으로 정통 왕권을 전수한 리처드 2세가 부족한 리더십으로 몰락해 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봉건귀족의 타락 등 국가의 위기를 목도하면서도 통치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던 리처드 2세의 내면의 고뇌에 초점을 맞췄다.
“1590년대의 정치드라마를 생생하게 재연하는 데 초점을 맞췄지만 관객들이 오늘날과도 맞닿는 지점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고 연출가 남육현 씨는 설명한다.
서울시극단의 ‘말괄량이 길들이기’(17일∼10월 5일·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M씨어터·02-399-1114)는 부잣집 말괄량이 딸 캐서리나가 신사 페트루치오를 만나 얌전한 숙녀로 변하는 과정을 담은 셰익스피어 작품. ‘남성 우월주의적 작품’이라는 페미니즘 평론가들의 지적을 받기도 했던 이 작품을 “주인공 남녀가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과정”(연출가 전훈 씨)으로 해석한다. 독일 연출가 루크 페르체발 씨가 선보이는 고전 ‘오셀로’(10월 10, 11일·서울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02-3673-2561)도 원전의 주제를 고스란히 복원해 인간의 사랑과 질투를 강렬하게 묘사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체호프의 작품에 대한 기대도 크다. 제2회 세계국립극장 페스티벌에서 선보이는 ‘세 자매’에서는 러시아 국립 모스크바 말리 극장의 연출과 배우들을 만날 수 있다. 체호프 작품을 가장 잘 재연한다는 말리 극장은 이번 공연에서 19세기 초 러시아의 풍경을 생생하게 살려낸 무대세트와 소품, 의상 등으로 리얼리즘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상적인 꿈만 꾸는 세 자매의 모습을 통해 나약한 지식인의 모습을 풍자한다.
예술의 전당 개관 20주년 기념작인 ‘갈매기’(11월 7∼23일·예술의 전당 토월극장·02-580-1248)도 러시아의 유리 부투소프 씨가 연출을 맡는다. 여배우를 지망했다가 좌절하는 니나와 작가를 지망하는 청년 트레플료프를 통해 삶의 근본적인 불만족과 욕망의 문제를 탐색한다.
연출가 구태환 씨의 ‘벚꽃 동산’(18일∼10월 12일·서울 남산드라마센터·02-889-3561)은 체호프 원작의 대사를 단 한 줄도 바꾸지 않는 시도를 한다. 원작이 보여주는 인물 간 소통의 단절로 인한 코미디가 관객들의 삶을 반추하게 할 것이라는 게 구 씨의 설명이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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